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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Jul 04. 2022

“아빠 죽으러 간다, 잘 있어”

인도 아그라


당일치기를 고민했던 도시 아그라에서 2주나 머물렀다. 역시 여행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구나! 인도 물갈이를 아그라에서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태와 나, 동시에 물갈이를 시작한 탓에 상대방을 보살펴줄 수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불쌍하게 바라볼 뿐. 발리에서 샀던 지사제도 듣지 않았다. 인도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고 겨우 나았다. 인도 물갈이는 인도 지사제만 듣는다더니 사실이었다.


아그라를 떠나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타지마할에 갔다. 날씨도 화창하고 햇볕도 따뜻해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타지마할에 오기 전 수만에게 들러 인도 전통 의상인 사리 입는 법을 배웠다. 수만은 옷맵시를 고쳐주며 인도 팔찌를 선물로 주었다. 수만의 남편 라무까지 나에게 사리가 너무 잘 어울린다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인도 전통 의상 사리를 입고


타지마할에서 사리를 입고 돌아다니면 연예인 체험을 할 수 있다.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함께 사진 찍자고 말을 걸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내 뒤를 쫓아오는 인도 사람들을 피해 “노노 노노노 노노노” 외치며 도망 다녔다. 사진을 같이 찍어줄 걸 그랬나, 등 뒤로 “Please!”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사리 입은 외국인이 신기하게 보였을 텐데.

예전의 나였다면 기쁘게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다가오는 사람들이 숨이 막힐 만큼 불편하다. 차라리 내가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떤 관심도 부담스럽고,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날 쳐다만 봐도 싫다. 언젠가부터 사람 대하는 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모임을 만들고,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회계를 자처하던 나였다. 사람들과 북적북적 둘러앉아 웃고 떠들면 몸은 피곤해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낯선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나였는데, 지금은 옆에서 한국말이 들려오면 말을 걸까 봐 지레 겁을 먹는다. 사람을 신뢰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귀찮고 허무하다. 무례한 사람을 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사람이 싫어 사람을 피해 다닌다.

지구 반대편, 그것도 인도 아그라에서 나의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알아챘다. 도피성 세계여행은 아니었다. 세계여행은 꼬박 10년째 나의 꿈이었다. 때마침 돈과 시간, 그리고 지태의 결심까지 삼박자가 맞았다. 다만 사람에게 너무 지쳐 있었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칼을 후벼 파는 가식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헌신하니까 헌신짝이 되어버렸다.


자고로 맏이의 미덕은 첫째도 인내요, 둘째도 인내요, 셋째도 인내이다. 만 두 살 때 둘째가 태어나면서 나는 아이 자격을 잃었다. 곧이어 태어난 셋째는 맞벌이였던 부모님 대신 내가 돌봤다. 유치원에 다녀와서 막내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였다. 나가서 친구랑 놀고 싶으면 막내를 업고 가야 했다. 부모 역할을 요구하면서 그게 언니의 의무라고 했다.


어느 날 아빠가 우리 세 자매를 끌어안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제 죽으러 가. 잘 살아. 이제 아빠 다시는 못 만나. 나중에 천국 가서 보자.”


그날은 그저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빠가 짐 싸서 할머니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아빠는 지금도 멀쩡하게 살아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 셋은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저녁 늦게 돌아온 엄마는 울고 있는 우리를 밀치며 소리 질렀다.


“그렇게 슬프면 너희 아빠 따라 꺼져버려!”


엄마는 화가 날 때마다 우리를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대했다. 한국에 있을 때 텅 빈 방에 혼자 있으면 ‘죽어야 하는데 아직 살아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를 혼낼 때마다 늘 하던 소리였다. 10년 넘게 들어왔던 말이라 이제는 엄마 없이도 자주 들린다.


이런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랐다. 멀쩡하게 자라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도 나는 내 마음이 멀쩡하다고 믿었다. 뛰어난 내 연기에 나조차도 깜빡 속아버렸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서 모두 잊었다. 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중요한 순간마다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주변 사람들과 조금만 사이가 틀어져도 이별을 준비했다. ‘엄마도 아빠도 나를 떠났는데 이 세상에 누가 날 사랑하겠어?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역시 내가 행복해질 리 없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이 날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놓아버릴 준비를 한 것이다.

장녀라서, 가난해서, 포기하고 양보해야 했던 순간들 때문에 당연히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니까, 나만 참으면 조용히 지나갈 테니까.


Drawing by 언언



그게 아니었는데. 적어도 나만큼은 오롯이 내 편이 되어야 했는데. 내가 힘들다면, 내가 싫다면, 남들이야 뭐라던 내 마음 먼저 생각해도 괜찮았던 건데. 나의 희생은 당연한 게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 마음만 신경 쓰느라 내 마음 병든 걸 몰랐다. 내가 내 마음을 돌보는 게 이기적인 일인 줄 알았다. 세상에 너무 늦은 건 없다지만 내 마음 알아주는 게 너무 오래 걸렸다.


그렇게 사람을 피해 다녔는데 좋은 사람들은 한 마디 예고도 없이 나에게 훅- 하고 안겨 들어왔다. 수만의 가족이 그랬다. 인도 물갈이로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 수만은 자기 식당 주방을 쓰게 해주었다. 수만이 준비해준 인도산 재료로 한국식 달걀 죽을 했다. 아플 때 먹는 죽이 이렇게 맛있었던가, 한입 먹을 때마다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비나와 조이,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 모두 바람처럼 스쳐 가는 이 나그네를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뾰족하게 날 서 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낯을 가리고 사람을 피해 다니던 내가 신나서 말을 쏟아냈다.


“See you on the other side!” (지구 반대편에서 또 만나자!)


우리는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다음에도 우연히, 지구의 반대편에서 만나자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기쁘게 헤어졌다.

무례한 사람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따뜻한 사람을 통해 낫는다.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아마 다시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 지구 곳곳에 살고 있는 나의 가족들로 인하여.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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