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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Aug 01. 2022

히말라야가 남긴 훈장

네팔 ABC 트레킹 3


찝찝하다. 매일 땀을 흘리는데 씻을 수가 없다. 고산 증세가 있으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으면 안 된다. 혈액 순환이 빨라져 고산병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몇 장 남지 않은 물티슈로 겨드랑이를 닦으며 생각했다.


‘네 주제를 알라.’


너한테는 푼힐 전망대가 딱이었다고 속삭이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포기하지 않는 중이다. 어차피 등산이란 두 가지 선택밖에 할 수 없다.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것만큼 똑같이 힘들다면 올라가고 싶다. 걷는 동안엔 이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_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내일이면 ABC에 도착한다. 허무하고 허무하다. ABC에 도착하면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이나 자부심이 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열흘 동안 매일매일 내 한계를 시험하듯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고산병과 물갈이 때문에 일정을 늘리면서 가져온 현금이 부족해졌다. 삼시 세끼 제일 저렴한 채소 볶음밥만 먹었다. 팔팔 끓인 물이 밤사이 얼어버릴 만큼 추운 날씨에 싸구려 침낭은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매일 밤 이를 달달 떨며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한 걸까. 학교에 다닐 땐 일주일씩 밤을 새우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생겼다. 그러나 트레킹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 없이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룬 게 없는 기분이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지태가 운을 뗐다.

그렇게 보니 허무할 수도 있겠다. 트레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남지. 그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트레킹은 결과보다 고생했던 과정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것 같아. 우리가 세계여행하면서 또 이렇게 힘들 때가 있을까? 아마 살면서 두고두고 기억날 거야. 남들이 안 된다고 하던 일을 우리가 해냈다고.


얇은 경량 패딩과 바람막이, 패션 바지로 ABC 등정 성공


  순간조차 의심해본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없었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 여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도착.


일어나보니 롯지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보통은 일출을 보고 새벽같이 하산하는데 고산병 때문에 밤새 뒤척인 우리는 일출을 포기하고 늦잠을 잤다. 새벽에 부산스러운 소리에 잠깐 잠에서 깨긴 했으나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늦장을 부린 덕분에 아무도 없는 히말라야 봉우리를 전세 내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바람마저 고요하니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우리 둘뿐인 듯했다.


우리 둘밖에 없던 ABC의 아침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던 히말라야 정상에 도착하다니 분명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데 내 삶은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다. 살이 빠졌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잠깐 허탈하게 앉아있는데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겠지만 대단히 변한 것이 하나 있다고. 바로, 이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다고. ‘그거 어려운데, 안될 것 같은데. 하지 말까?’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뒤이어 내 안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ABC까지 왔는데,
이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 정상에 오르는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나에게 히말라야가 수여 한 훈장이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이 거대하고, 트레킹 내내 닿을 수 없어 보였던 히말라야가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아침을 먹고 하산하는데 안개가 너무 심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오후부터 치기 시작한 눈보라가 밤새 쌓여 무릎까지 왔다. 하산하다 보면 ABC를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칠 수 있다. 모두 위 상황이 어떤지,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갈 수 있는 상황인지 물었다. 히말라야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어서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산사태가 나면 며칠씩 롯지에 발이 묶이고 코앞에 ABC를 두고 하산해야 한다. 우리가 ABC를 떠나고 다음 날 계속된 폭설로 많은 사람이 그냥 하산했다고 한다. 우리도 하루만 늦었다면 ABC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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