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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elle Lyu Mar 18. 2022

김혜진 <딸에 대하여>를 읽고

작가 이야기

김혜진 <딸에 대하여>를 읽고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억눌림을 토로하다


두 사람이 길을 걷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걸어가는 방향 등 뒤로 생긴다. 

그림자의 길이가 조금 다르다. 길지 않은 그림자의 길이로 보아 태양이 머리 위를 조금 비추고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앞만 향해 걷는다. 말없이 걷는 그들 가까이에 푸른 창문이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푸른 희망을 향해 가고 있고, 곧 창문을 통해 보이는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처럼 희망이 보일 것이란 메시지를 작가 김혜진은 <딸에 대하여> 책 표지의 그림을 통해 잔잔하게 드러낸다. 

김혜진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를 선택했다. 이 제목으로 독후감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오로지 내가 딸에 대하여 가지는 애잔한 마음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공감하듯이 세상의 모든 딸은 유전학적으로 엄마와 같은 성, 동성이라는 한 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많은 아픔을 갖게 만든다. 여자로서 벗어날 수 없는, 같은 인생 여정, 생을 가야만 하는 운명적 만남은 바로 엄마와 딸을 심적으로, 정적으로, 육적으로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하나가 되게 한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여자가 보이는 딸에 대한 처절한 아픈 사랑을 김혜진은 ‘딸에는 내 삶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36쪽)라고 피력한다.

<딸에 대하여>에는 ‘세상에 내로라’하는 대단한 가진 자와 높은 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 두 명이 걷는 모습이 그려진 책 표지가 이미 전제하듯이 재벌이나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등장인물은 거의 전부가 여자이며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자들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자신이 나름대로 세우며 지켜온 원칙을 고수하며 ‘자기다움’에 대해 가장 올곧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누구보다 가장 자신답게...

이 소설은 여자들의 이야기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레즈비언, 동성애자, 현재 보편적으로 이슈화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로서 최저 생활도 어려운 강사료를 받으며 그나마 이곳저곳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는 시간강사,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무수한 아르바이트생, 현대를 사는 누구라도 비켜갈 수 없는 치매를 앓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눈을 뜨는 순간 바로 언제나 매스컴이나 신문 지면에 매일처럼 사회적 약자로서 등장하는 타인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며 이야기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는 공부를 많이 한, 나름대로 최고라 여기는 딸이 방세를 낼 형편도 용이하지 않아, 거처할 곳이 없어서, 엄마에게 의탁해야만 하는 사정을 말하러 온 딸애의 모습을 보며 ‘조금 지친 것 같기도, 마른 것 같기도, 늙어 버린 것 같기’(7쪽)도 하다고 생각한다. 


가락국수 가락을 건지며 엄마와 딸은 극도로 서로에게 조심하며 할 말을 고른다. 하나 아무리 말을 고르고 순화해도 이미 예견된 빗나간 감정은 길을 찾지 못한다. 결국 말을 참았던 엄마는 대답을 강요하는 딸에게 ‘그래. 방법을 고민해 보자’(11쪽)고 말한다.


엄마에겐 ‘변두리 좁은 골목에 썩은 이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9쪽)이 가진 것의 전부다. 딸은 그 마나도 없다. 엄마가 표현하는 자신, ‘주인을 닮아 관절이 닳고 뼈가 삭고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지는 이 층짜리 주택’(9쪽)이 현재, 엄마 자신의 모습이다. 


엄마는 나날이 작아지고 시들어가는 자신을 직시한다. 요양보호사로서 자신을 책임지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자신이 홀로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녀의 삶은 현대를 사는 대다수 엄마의 모습을 대변하는 산증인처럼 보인다. 


그렇게 하루하루 낡고 작아지며 자신의 몸 하나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엄마의 눈에 보이는 자신의 분신인 딸은 모든 것이 너무나 엉켜버려 수정할 곳이 너무나 산재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 ‘딸에의 잘못은 곧 나의 잘못이다.’(46쪽) 


엄마의 시각으로 보는 딸의 상황은 대화조차 쉽지 않다. 

소설의 화자인 엄마는 딸에게 하고픈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참고 잠재우고 마지못해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엄마는 딸애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한동안은 딸에 대한 생각에만 붙잡혀 산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엄마는 딸과의 끝없는 평행선이 되는 모든 힘든 상황과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살려는 노력을 신앙에 의지한다. ‘아주 아플 때 말고는 교회에 안 간 적이 없다’(51쪽)는 문장은 결국 ‘나이 들어 힘이 떨어지고 모든 것이 내 힘으로 안 된다고 여길 때’ 모든 부모, 엄마들이 의지하는 믿음, 신앙을 찾는 보편의 심리를 대변한다. 이 문장이 보여주는 강도가 너무나도 커 마음이 바닥부터 저려온다.

엄마는 안다. 모든 상황이 ‘침묵을 키울 뿐이다’(54쪽)는 것을... 엄마와 딸 사이에는 오랜 캄캄한 침묵이 흐른다.

소설의 화자인 엄마는 오래 치매를 앓고 있는 젠(GEN)을 맡아 돌보는 요양보호자다. 요양보호자로서 엄마는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60대의 나이를 살고 있다. 그런 삶을 살며 두 세대를 지나고 있는 엄마는 거처할 곳이 없어 낡아빠진 허름한 집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제 한 세대를 지나고 있는 딸, 그린(동성애자인 레인이 부르는 이름)을 회환과 아픔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요양보호사로서의 일이 엄마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그녀가 돌보는 젠은 ‘너무 오래 산 여자, 어디론가 기억이 줄줄 새고 있는 여자, 오래전 태어날 때처럼 여자, 남자, 그런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다만 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여자’(18쪽)다. 엄마가 직시해 보여주는 젠에 대한 묘사에서 이제 엄마에게 보다 나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암시된다. 엄마는 마치 젠이 자신의 상황을 직시해 보여주는 것처럼 멀지 않은 그 모습이 자신의 투영도임을 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귀국 후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람을 보살피다 평생을 허비한 사람,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 하나 갖지 못한 이 여자에게 내가 가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세계의 풍광과 1년 내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독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18쪽) 

엄마는 곧 자신에게 밀려오는 고독의 무게를 본다. 고독한 한 여자의 마지막이 이보다 더 잘 보일 수 없다. 엄마는 독백하듯 젠의 모습에서 고독을 자기의 몫으로 빌려온다. 

젠은 1989년, <국경의 아이들>을 쓴 여자이며, 국경에 서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후원했다. 그녀의 후원을 받은 수많은 아이 중의 하나인, ‘띠팟’은 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젠이 지내왔던 어쩌면 누렸다고 할 수 있는 한 때의 찬란함, 젊은 날의 찬란함 그리고 모두가 다 사라진 뒤의 허무함을 젠을 기억하지 못하는 ‘띠팟’을 통해 작가는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으로, 젠을 기억하지 못하는 ‘띠팟’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한두 번은 감행했던 세계 기아 난민에게 보내는 동정과 연민의 기부가 과연 어떤 상황인지를 김혜진은 작은 소리로 우리에게 각성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화자인 엄마는 젠을 통해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을 보게 된다. 소변을 가리지도 못하는 어린애가 되어버린 여자. 화자인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훨씬 더 나이가 든 여자, 젠은 엄마에게 말을 한다. ‘고와, 곱다’고. 이 곱다란 표현에서 작가 김혜진은 엄마라는 존재는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마음이 하나인 사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김혜진은 고운 마음과 모습을 한 엄마, 고운 심성을 가진 엄마를 내세우며 엄마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는 세 여자의 이름을 단어가 주는 본질로서 등장시킨다. 


김혜진이 그린 딸, 그린(Green)은 시간강사이며 동성애자이며 몸을 사르지 않고 타인을 위해 시위 판에 뛰어드는 용기를 가진 30대의 여자다. 김혜진은 아마도 이런 그린을 빌어 현사회가 가진 산재한 숙제들을 해결하는 새싹(Green)에 의미로 그린을 부각했다고 여겨진다.


그린과 동거 동락하는 레인(Rain)은 그린이 다치고 무너지고 무너질 때마다 언제 어디서건 번개같이 나타난다. 마치 그린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보이는 레인은 분명 그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비(rain)의 이미지다. 게다가 레인은 그린을 세우는 사람이며, 동시에 엄마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그린 사이를 좁히는 언제나 한결같은 중재자 역할을 한다. 레인이 만들어서 엄마에게 건네는 한 조각의 샌드위치는 엄마에게 영혼의 양식이자 치유의 양식이 된다.

그리고 젠(Gen), 마치 인류를 구하듯 여성으로서 전 세계를 누렸던 그녀는 지금 말조차 어눌하고 작고 가여운 한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아무런 요구도 못하는 젠은 그저 어린애처럼 엄마를 찾는다. 지난날 그녀가 했던 모든 행동은 소명의식은 엄마를 부르며, 엄마를 세우며 엄마를 매개로 한 세계에, 새로운 탄생을 기약하는 구원이 상징으로 보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많은 것을 화두로서 세상, 사회 중심에 내놓고 주시한 김혜진의 삶의 가치와 철학을 보았다. 그러기에 완벽하게 이 소설을 내 것으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오래전 이미 한 사람의 아내, 의사부인으로서 전 세계를 섭렵하며 살았으며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큰언니가 젠이 되어왔다. 또한 취업 중이며 누구나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는 관심조차 없는 큰 아이, 아들이 소설 속의 딸이 되어 나의 마음을 괴롭혔으며, 지금 이곳저곳을 떠돌며 간헐적으로 강의를 하는 내게 화자의 딸이 ‘나도 같은 처지라’며 아픈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내게 힘을 주는 친구 40여 년 지기 영순이가 레인이 되어 큰 소리로 내게 격려를 보냈다. ‘넌 정말 잘하고 있어’라고.

이제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작가가 전하는 말, 글을 쓰며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글이 작가의 말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하는 나의 말’이었다는 것으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고맙다. 나의 딸 민효... 엄마의 딸이어서. 이 글을 읽게 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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