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사회』, 정지우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GMXxScL6sag
전통적으로 불교 철학은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깨달음>의 불교적 의미를 거칠게 약술하면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들, 즉 번뇌로부터의 자유함’이라고 할 수 있죠. 번뇌의 대표적인 예시로 불교는 <삼독>을 제시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우리 마음의 세 가지 독을 가리키는 것으로 탐욕(貪慾, 욕심), 진애(嗔恚, 성냄), 우치(煩惱, 어리석음)를 의미하죠. 즉 무엇인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욕심과, 타인을 시기·질투하고 미워하는 분노, 그리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세 가지 독이라는 설명입니다. 불교는 바로 이 삼독을 제거하도록 수양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깨달음의 상태로 도약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실은 부처라는 말의 의미도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बुद्ध)’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섣불리 삼독을 제거하도록 노력하기에 앞서 그것들의 가치를 재고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우리는 욕심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며, 또한 어리석음은 도리어 진리를 깨닫기 위한 첫 걸음일지도 모르니 말이죠. 그 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분노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가 바로 분노이니 말이죠. 분노의 현대적 의미를 재정의하며 나아가 우리 사회의 혐오와 갈등을 사회적 차원에서 분석한 오늘의 책, 정지우의 『분노사회』입니다.
: 관념적 분노
예부터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요컨대 이성이 논리적 사유를 통한 <판단 능력>이라면, 감정은 외부 사태에 대한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마음의 움직임>으로 설명되곤 했죠.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흐르는 눈물(슬픔)이나, 혹은 홀로 걷는 밤길에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긴장, 공포)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체적 반응들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으로부터 빚어진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죠. 분노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감정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 분노란 외부의 위험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본능이라는 설명이죠. 하지만 근대 국가가 들어서며 <합법적 폭력>을 국가가 독점하게 된 현대 사회의 시민들은 생존의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분노해야 할 필요가 과거와 비교해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죠. 이러한 점에서 『분노사회』의 저자 정지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현대 사회의 분노는 <관념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은 연인에게 산업사회 이전보다 더 많이 분노할지도 모릅니다. 산업 사회가 가져온 <시간 준수의 관념>이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 관념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실내에서 흡연을 하는 타인에게 과거에 비해 더 격렬히 항의할 것입니다. 이는 간접흡연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과, 실내 금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죠.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분노하는 순간들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기대했던 사회적 윤리와 합의가 마땅히 이행되지 않는 순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념적 분노는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날까요?
: 내면의 어긋남
현대 시민의 관념적 분노는 사회 개선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령 과거 대한민국이 독재와 폭압으로 점철된 가슴 아픈 근현대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정의로운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반대로 부당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 <분노>는 해결 불가능한 <증오>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유형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번째 유형은 <실패한 자기 서사로 인한 시기>입니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고유한 언어로 써 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길 것인지, 어떤 사람과 관계 맺을 것인지, 또는 어떤 속도로 살아갈 것인지 등을 선택할 수 있죠. 즉 우리는 자기 삶의 관념을 스스로 확립해야 하는 자기서사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서사에 실패한 인간의 마음은 금세 타인을 향한 시기로 얼룩집니다. 요컨대 스스로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내지 못할 때 우리는 타인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게 되고, 내 삶을 비루하게 만든 타인을 시기하게 되죠.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향한 시기어린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내면으로 눈길을 돌리는 자기서사의 의무를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번째 유형은 <집단으로의 도피>입니다. 이는 자기 내부에서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 집단의 정체성에 몰입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죠. 즉 자기만의 관념이 부족한 나머지 집단의 관념을 내면화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많은 집단들이 다른 집단을 혐오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근대 유럽 국가들의 민족성이 나폴레옹의 침공과 함께 생겨난 것처럼(“근대 유럽 국가에서 각 국가의 민족성은 나폴레옹의 침공과 함께 생겨났다”, 『분노사회』, 정지우) 집단의 정체성 역시 외부를 배제함으로써 내부를 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현대 한국 정치 지형의 극우 및 극좌 세력들은 생산적인 토론과 합의를 실행하기보다 상대진영을 혐오함으로써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려 합니다. 즉 내부에서 이상적인 정치 담론을 생산하기보다 바깥 세력을 배격함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수많은 집단들은 크고 작은 분노를 공유하는 분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세번째 유형은 개인주의적 분노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집단주의에 대한 반향으로 근래의 젊은 세대로부터 시작된 분노입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집단의 규율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합니다. 예컨대 그들은 상명하복으로 대표되는 군대문화나, 수직적 위계질서를 고수하는 기업문화, 혹은 가부장적인 가정문화 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개인의 역할이 집단 속에서 획일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그들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가치가 훼손될 때 강력한 분노를 드러냅니다. 이를테면 언론의 자유나 민주주의, 혹은 경쟁의 공정성과 같은 개인의 보편적 가치 실현에 보다 큰 관심을 갖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대적 분노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 주체성과 타자의 복원
저자가 제안하는 분노 해결의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 번째는 <성장하는 자아>입니다. 자명하게도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가령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남자는 장차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낼 확률이 높고, 종교색이 뚜렷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종교적 세계관에 비교적 익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죠.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인의 분노는 상당 부분 그 사회에 책임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제도가 항상 삶을 실패하는 방향으로 구성원을 이끌고 있다면 그 사회에 분노가 넘쳐나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다.”, 『분노사회』, 정지우). 만약 우리의 분노가 온당하지 못한 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사회를 개선하도록 힘쓰는 것이 우선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반대로 인간은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인류는 노예제라는 전근대적 악습을 더 이상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으며, 또한 여성의 정치 참여를 억압했던 모순된 사회 구조를 바로잡는 데 힘써 왔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우리의 성장하는 자아라고 설명입니다. 요컨대 인간의 자아는 그 시대의 관념에 종속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성장하고 발전하는 <유동하는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끝없는 배움을 통해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구축해야 한다는 설명이죠.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변화는 사소하더라도 사회 전체의 한 부분이 바뀌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붕괴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먼저 스스로 성장할 의무를 지닌 존재라는 이야기이죠. 이어서 두 번째는 <책임 있는 개인>입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대체로 집단주의적 성향에 반감을 가지며 개인주의적 생활 양식을 지향합니다. 나아가 그들은 자기만의 삶, 자기만의 꿈, 자기만의 개성을 구축하기를 소망하죠.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진정한 개인주의의 본질은 타자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타자와의 <연결>이라고 설명됩니다. 저자는 다음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부채의 삶이면서 기부의 삶이다”, 『분노사회』, 정지우). 사람과 관계 맺기 싫어 집 안에만 칩거하는 사람조차 실은 타인이 수확한 열매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법이죠. 따라서 현대적 개인주의의 방향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집단>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연대>를 재건해야 합니다. 가령 집단 속의 인간이 <역할>을 강요 받는 수동적 존재라면, 연대 속의 인간은 <책임>을 발휘하는 능동적 존재이죠. 따라서 우리는 문화 발전에 기여할 의무, 정치 참여의 의무 등 타자와 사회에 대한 거룩한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분노를 덜어내는 데 실제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정지우의 『분노사회』를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분노가 관념에 대한 분노라고 설명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당연한 관념>이 위배될 때 분개하죠.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분노는 인간이 관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당한 관념을 추구하는 인간은 부당한 사회에 분노하며 사회 개선에 기여할 수 있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작금의 한국 사회의 분노는 정당한 관념에 대한 분노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자기 삶의 개인적인 불만과 좌절로부터 비롯된 분노를 부당한 사회 관념에 대한 분노인 것처럼 투사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반항자>란 정당한 관념에는 복종하고 부당한 관념에는 반항할 줄 아는 존재라면, 그에 반해 <반역자>는 정당한 관념을 고민하지 않고 그저 자기 내부의 분노에만 사로잡힌 존재라 할 수 있죠. 만약 우리 사회에 반역자의 분노만 횡행하다면 우리 사회는 어떠한 발전도 없이 그저 해결불가능한 증오 가득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분노하기에 앞서 보편적 관념을 고민하는 사회가 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