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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30. 2022

행인은 행복을 꿈꾸지 않는다.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행복이 도처에 전시되어 있다. TV를 켜면 젊음을 되찾아 주겠다고 공언하는 휘황찬란한 상품 광고가 즐비하고, 각종 SNS는 휴양지를 찾은 방문객들의 인증샷을 쉼 없이 토해낸다. 서점가는 부와 행복을 거머쥘 수 있는 지름길이 베스트셀러 진열장을 점령한 지 오래고, 거리엔 무채색의 현실을 위무하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발길을 잡아끈다. 현대인은 이다지도 쉴 새 없이 행복을 권유 받는다. 더이상 행복의 관람객이 되지 말라며, 기꺼이 행복의 소비자가 되라며, 끊임없이 행복을 요청 받는다. 그 때문일까. 오늘날 행복을 꿈꾸지 않는 현대인을 찾기란 퍽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급기야 뭇 세인들은 행복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에 이른다. 한강이 내다보이는 45평 아파트, 544마력을 자랑하는 고급 세단, 영롱한 광택이 반짝이는 뱀가죽 핸드백 운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같은 행복의 구체성은 한 가지 역설을 드리운다. 행복의 영역이 명확하고 선명할수록 그 바깥의 영역, 이른바 비(非)행복의 여지도 뚜렷해진다는 역설이다. 가령 대학에 가는 것만이 행복의 영역이라고 꿈꾸는 사람에게 대학의 낙방이란 행복의 바깥, 즉 불행의 요소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계획하는 만큼 그와 동시에 불행의 덫에 포획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정녕 행복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도리스 레싱의 작품 『다섯째 아이』는 이 암울한 질문과 공명하여 행복의 민낯을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때는 약 20세기 중턱이 이제 막 지난 무렵의 일이다. 당시 런던은 전통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여성의 인권을 향한 몸부림이 꿈틀대던 중이었고, 이제껏 억압된 욕망을 되찾기 위한 부르짖음이 시작됐으며, 정형화된 가족중심주의가 해체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런던의 젊은이들이 벌이는 문란한 성관계와 마약 흡입, 비혼주의 등의 문화는 도리어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정당한 대응이었으리라. 하지만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그러한 변혁의 한 가운데에서 여전히 옛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인 행복을 소망했다. 이를테면 정원이 딸린 커다란 저택에서, 마당을 한가득 메우는 자녀들과, 이따금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고,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는 모성애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부성애가 넘치는, 그런 전통적인 가족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이 같은 소망은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난 이후 산산이 부서진다.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비정상적인 아이의 등장으로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구축해온 행복한 가정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체 벤이 무엇이길래.



작품의 저자 도리스 레싱은 데이비드 가정이 마주한 불행의 근본 책임이 벤에게 있다고 독해 되길 바라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해리엇의 언니 사라가 낳은 딸 에이미 역시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작품 어디를 둘러봐도 요주의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벤이 가정으로부터 배척 당하는 이유 역시 벤에게 내재한 장애 요소 때문이 아님을 에둘러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도리스 레싱은 『다섯째 아이』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계획했던 행복이 산산이 부서질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후술한 바 있다. 따라서 본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바람직한 주안점은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태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다분하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행복에 관한 남모를 집착을 가진 이들이다(“행복. 행복한 가족. 로버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예컨대 그들은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제임스에게 손을 벌리면서까지 거대한 빅토리아풍 저택을 욕심내고, 또한 자력 양육만으로 부족하여 어머니 도로시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잇따라 자녀 계획을 이어간다. 요컨대 그들은 ‘행복해야 한다’라는 그들 자신의 과도한 행복 의식을 지탱하기 위해 아버지의 경제력과 어머니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계획한 행복을 반드시 달성하고 말겠다는, 이 얼마나 질긴 고집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닌가. 하지만 이처럼 행복에 대한 계획이 명확하고, 또 그것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굳건할수록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취약한 법이다. 이는 서두에서 언급한 구체적 행복론의 역설과 궤를 같이 한다. 재차 말하지만, 행복의 영역이 선명할수록 그 바깥에 자리한 비(非)행복의 영역도 덩달아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끝내 벤을 포용하지 못한 현실은 ‘계획된 행복’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에 취약한 해리엇 부부의 민낯을 드러낸다. 벤은 해리엇 부부의 계획을 한참이나 벗어난 ‘비정상적’인 아이였고, 달리 말하자면 행복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였다. 따라서 협소한 관념으로 행복을 정의한 해리엇 부부의 행복이 벤의 등장 앞에 맥을 못 추고 흩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이 점에서 우리는 행복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자유롭던 존을 벤이 유독 잘 따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작중 해리엇 역시 이를 깨닫기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해리엇의 말 대로 그들은 행복을 바랐기에, 너무도 바랐기에 도리어 행복할 수 없던 것이다.




사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당대의 괴짜였을지도 모른다. 전통과의 전쟁이 한창인 20세기 중엽, 그것도 런던에서, 그들은 철 지난 구식을 외치던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작품 속에서 철저히 괴짜로 묘사되는 이는 오직 벤이며, 또한 묘사의 주체는 해리엇과 데이비드다. 이는 곧 그들 가족이 평등한 공동체가 아님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들 가족 내에는 권력과 위계가 존재했다. 가족 내에서 행복과 비행복,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주체는 부모이며, 이에 위해를 가하는 인물은 비정상으로 낙점되어, 까닥하면 방출될 위기에 처하기까지 한다. 가령 해리엇 부부는 벤을 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따위의 선택지를 당연한 듯 차지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토록 불평등한 가정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벤은 해리엇 부부가 구축한 가정의 행복을 파괴한 원인일 수 없다. 반대로 벤은 이미 시작부터 불완전했던 해리엇 가정의 모습을, 그 안에 내재한 불행을 가벼이 들춰주었을 뿐이다. 만약 해리엇 부부의 가정이 이미 행복했다면 그들은 기꺼이 벤의 뺨에 입술을 비볐으리라.


행복을 꿈꾸지 않기란 힘들다. 그것이 본능이건, 이성적인 목표이건, 여하튼 인간은 지금보다 나은 현실을 계획하고 꿈꾸며 눈앞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을 ‘도착’해야 할 그 무엇으로 사유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도달하지 못한 삶의 모든 여정을 불행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착한 그곳에 행복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장담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게다가 그 모든 길 위에는 이따금 다른 얼굴을 한 벤이 등장하곤 할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장애물이자 행복의 근간을 뒤흔드는 변수 말이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삶을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요양원에 벤을 보내듯 그저 외면하고 회피하려고만 할 것인가?



행복이 도처에 전시되어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벤의 초연함은 아닐까. 그렇다면 눈동자를 읽을 수 없는 벤의 무구함을 닮아 우리 역시 행복을 아주 유연하고 느슨하게 사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여 행복의 목표란 언제고 생성되고 파괴될 수 있는 것쯤이라 여겨보는 것은 어떨까. 행복을 좇는 자들에게 벤은 행복의 장애물일 테지만, 행복을 열어둔 자들에게 벤은 포용의 대상이다. 너도나도 행복을 좇는 이 시대에 홀연히 행복을 비우는 괴짜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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