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어려울 때 필요한 것

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by 예그림


오늘 읽은 챕터의 제목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 관계가 어렵고 두려운 당신에게'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한 권의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아들러는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고민의 거의 99%는 인간관계와 연결되어 있고, 무인도에 혼자 존재한다면 대부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관계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두렵다. 관계가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거나 사기꾼이다. 관계를 잘한다 못한다(그 기준도 애매하지만)에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계 맺음의 욕구가 있고, 그 관계 맺음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게 마련이다. 관계가 하나도 없고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 관계없음과 친구 없음이 고민일 테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의 고통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당연한 명제이다.


관계에서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심플하게 정리하자면 '관계의 맥락'이 필요한 것이다. 관계가 맺어지는 상황 맥락, 그 당시를 떠나 관계를 처음 맺었을 당시의 상황 맥락, 상대의 과거와 현재 특성, 상대와 나와의 관계 변화의 맥락, 이 관계를 맺는 현재 시점에서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맥락, 지금 나의 컨디션이나 상태, 상대방의 컨디션과 상태, 장소......

이 수많은 '맥락'을 고려해야만 우리는 '완벽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가능한가..?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햄버거를 주문하려면 원하는 메뉴를 정하고 매장에서 먹을지 포장해서 가져갈지를 결정한 다음,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질문에 그대로 답하면 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간결한 정답을 택할 여유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르바이트생의 눈초리는 어딘지 모르게 나를 얕잡아 보는 것 같아.' 말투가 조금 퉁명스러운데 내가 만만해서 그런 건 아닐까?'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눈치채고 지질하다며 속으로 욕하는 건 아닐까?'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 이두형 p. 50.



햄버거 주문이라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관계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이 글의 주인공은 절대로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설령 아르바이트생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새로운 '관계의 맥락'에서 만난 이상 그 관계는 또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이해하기에 작가님이 강조하는 점은 그 다양한 관계의 맥락 중에서 '나의 심리'라는 맥락에 집중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할 때 자꾸 상대방(대상)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와 상황에 맥락에 맞추어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삶에서 맺는 나의 관계인만큼 여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것도 '나'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두려운 상황은 끝이 없다. 그러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의문에 모두 괜찮다는 답을 달 수 있어야지만 괜찮은 것이 아니다. 두려운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실제로 무언가가 잘못되리라고 예견할 필요는 없다.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 이두형 p.50.



위의 인용구 역시 소름 돋게 나의 경험을 꿰뚫는다.


내가 아직도 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 중에 하나는 3월이다. 나는 2월 말이 되면 굉장한 스트레스와 악몽에 아직도 시달린다. 이유도 알고 원인도 알고 벗어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심리학 용어로는 '예측불안', 여기서의 표현이라면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것에 온갖 진을 다 쏟기 때문이다.

교사라는 것의 가장 큰 장점 중 단점이 매년 학생들과 동료가 바뀐다는 것이다. 가장 큰 장점은 아주 나쁜 학생이나 동료를 만난 경우 1년만 참으면 어떻게든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만, 아주 나쁜 단점은 그것을 매년 새롭게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같은 사람을 보는 회사원들의 고충도 정말 클 거라고 생각하지만, 매년 새로운 관계와 맥락과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라는 한마디로 표현되지만, 매년 상황 변수는 수도 없이 바뀐다. 2024년도의 나는 문학과 언어와 매체와 독서를 가르쳤다. 2025년의 나는 언어와 매체는 그대로이지만 화법과 작문, 고전 읽기를 가르친다. 작년에는 어쩌다 보니 고2 학생 350명을 모두 만났고, 올해는 고3이 된 학생들 200명과 고2학생 50명 정도를 가르친다. 고2학생 350명을 모두 만났으니 고3이 되어서 같은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친구들도 고3이 되고 다른 과목 교사로 나를 만났다는 새로운 맥락이 있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나 역시도 조금은 달라졌다. 고3 교사가 되니 나도 여유가 좀 더 없어진 것 같다.)

업무로는 교육과정부를 2년째 하고 있지만, 작년과 올해의 교육과정과 개설과목이 달라졌고, 선생님들도 재구성되고 바뀌었다. 교육과정이 바뀌며 교과서를 모두 새로 선정해야 하고 학생들 대상 프로그램도 새로 구성해야 한다. 학생들의 진로와 동아리도 모두 바뀌기 때문에 그것까지 다시 모두 재구성한다. 심지어 우리 부서는 3명인데, 올해는 나와 부장님만 그대로이고 다른 한 명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그분 조차 다가오는 2학기에는 새로운 선생님으로 변경 예정이다.)


항상 불안감에 시달리던 차라 너무 긴 하소연을 한 것 같지만, 사실 3 문단 정도를 더 썼다가 요약하고 삭제한 게 이 정도이다.. 요지는 조금의 맥락만 달라져도 관계가 모두 달라지고 '경우의 수'와 다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달라지는 모든 것에 '예측 불안'을 느끼고,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려고 하다가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

물론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새 뉴스에도 많이 나오는 반항하는 학생이나 민원이 많은 학부모님에 대한 대처방안도 엄청나게 상상하지만, 그 상상한 일이 벌어진 적은 아직까지 0%이다. 모든 비행과 민원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내가 상상 속의 경우의 수와 싸우다가 이미 정신이 지쳐버린다는 것이다. 책의 사연자가 햄버거를 주문하기도 전에 이미 스트레스받고 관계에 실패했다고 느낀 것처럼. (심지어 잘 읽어보면 아르바이트생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내 머리는 저 멀리까지 달려가서 학생이 극심한 반항을 하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장면까지 그리고 있다.



알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혼자만의 싸움. 이것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결국 답은 또 '수용'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나에 대한 수용'과 '상황에 대한 수용'으로 나뉜다.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퉁명스럽게 대하거나 속으로 나를 경멸할 가능성이 0%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의 수까지 모두 대비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나의 삶은 충분히 매끄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 이두형 p. 50



1.'나에 대한 수용'

일단 진짜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경멸한 가능성이 0%는 아니니까. 이게 먼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이다. 0%가 아닌 이상 고민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게 '나에 대한 수용'의 시작이다.

나아가서 '나는 경멸당하거나 퉁명스럽게 대해지는 것이 싫다'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르바이트생의 예시를 이어가자면 나라면 아르바이트생이 퉁명스럽게 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경멸할 거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대신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한다. 책 속 사연자의 키워드가 '퉁명, 경멸'이라면, 나의 키워드는 '무시'인 것이다. 누군가의 키워드는 '저 아르바이트생이 내 외모를 놀리면 어떻게 하지?'일 수도 있고, '저 아르바이트생이 나한테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일 수도 있다. 핵심은 관계의 맥락 속에서 두려워하는 키워드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마다 다른 그 키워드를 스스로 인식하고 수용해야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상황에 대한 수용

글 안에서도 일부 뭉뚱그려서 다루어지지만 상황에 대한 수용도 필요하다. 햄버거를 주문하는 상황에서 아르바이트생과의 관계는 아주 얕은 관계이다. 의식하고 자기 최면을 걸듯이 해서 무시한다고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하는 관계는 사실 더 가깝거나 연관성이 깊은 관계들이다. 직장 동료나 상사, 연인, 가족, 친구 등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관계들.

그 관계들에서도 1단계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용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키워드로 무엇을 어려워하는 지를 알아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아는 것 만으로 변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안다면' 변한다. 남들은 변하지 않지만 자신이 변한다.


그리고 아쉽지만, 내가 알고 변했는데도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상황에 대한 수용'이다. 아르바이트생과의 관계 같은 피상적인 관계는 그냥 가볍게 무시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게 무시되고 벗어나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1단계에서 자기 수용과 인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해 안다면 그를 무시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변했는데도, 내가 다른 맥락을 만들어도 상대와의 맥락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다. 책에서는 "잘 되지 않는 타인과의 사이를 억지로 돌리려 애쓸 여력이 있다면 사랑하는 이를 더욱 사랑하는데 쏟는 것이 낫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족을, 연인을, 친구를 사랑한다. 그런데 나의 변화에도 우리의 맥락이 변화되지 않고 괴롭다면, 그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맞을까? '서로 사랑'한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벗어나야 한다. 나의 맥락이 변화했는데 상대가 그 맥락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상대의 선택이니 내가 어쩔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대도 그 자신의 키워드 때문에 나와의 맥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결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맥락에서 물러나오는 것뿐이다. 상대 역시 자신의 키워드를 찾거나 변화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는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를 위해서라도 알고 있는 우리가 먼저 용기 내어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번 언급하게 되는 책 '미움받을 용기'는 상대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핵심은 나를 공격하거나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함께 싸우는 링 위에 올라가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


이 싸움이 의미 없고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수용과 인정.

그게 내가 생각하는 상황에 대한 수용이다.

위에서도 그래서 관계의 힘듦과 싸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썼다.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없다. 대부분의 싸움은 나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누가 이겨도 상처뿐이다. 또한 상대와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나는 먼치킨(압도적으로 강력한 캐릭터를 뜻하는 말)이 아니므로 내가 설령 이겼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라면 우리는 상대가 상처 입어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모종의 이유로 서로 사랑하는 상대와 내가 서로 피 흘리고 괴로워하는데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면, 내가 먼저 그 링에서 내려오고 피흘림에서 벗어나는 게 오히려 사랑 아닐까?

작가님은 '경우의 수에 모두 대비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이 매끄러울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매끄럽다'는 비단결처럼 걸림 없이 매끄러운 게 아닐 것이다. 좀 울퉁불퉁하고 찢긴 부분이 있더라도 '끊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끄럽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오히려 관계를 끊지 않고 싶다면, 나를 수용하고, 상황을 수용해야 한다. 지금 멈추는 것이 가장 빠르다.


우리가 계속 달리면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달리기를 멈추고도 격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의 호흡과 휴식을 가지면 천천히 돌아온다. 우리는 돌아올 수 있다. 나를 아는 것으로. 상황을 수용하고 벗어나는 것으로.




ps. 글을 퇴고하며 남기는 여담...

이 글을 읽고 혹시나 너무 아픈 사람이 있을까 걱정된다. 나 역시 받아들이기가 가장 아팠던 부분이기에. 이 글이 부족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가 아픈 부위에 마사지를 하고 물리치료를 받듯이. 진짜 더럽게 아프지만 그 부분을 풀어 주어야만 하고, 아픔을 지나면 뭔가 풀리고 회복된다. 이 글을 읽고 느낀 아픔이 그 아픔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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