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 앞에서

1화. 그해 봄, 아이가 조용히 멀어졌다

by gina

2024년, 아들의 마음의 문이 닫힌 해

돌이켜보면, 2024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버거운 해였다.

아들이 나에게 마음을 닫았고, 그 거리감이 오랫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들은 고3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들 한다.

아들의 성적은 그저 그렇고, 교우관계도 무난한 편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시기, 나는 비교적 내신을 따기 쉬울 것 같다는 이유로 인근 다른 학교를 권했고,

아들은 낯선 환경에서 고1을 힘겹게 버텨냈다.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 손에 자랐던 아들.

나는 맞벌이를 해야 했기에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아들은 낯선 상황에 대한 불안이 컸고, 나는 그런 아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랐다.

아이를 사랑했지만, 표현과 접근 방식은 서툴렀다.

나는 이성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고, 아들은 감정이 앞서는 아이였다.

길에서 두부를 파는 할머니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용돈을 털어 꼭 두부 한 모를 사 오던 아이.

내가 예민할 때도 무던히 받아주던 아이였기에, 나는 항상 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내뿜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체형을 두고 친구에게 놀림을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고, 그 당시에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단체운동을 시켜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시선만 믿은 채 아이의 말은 충분히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우관계로 힘든 일이 있었다.

아들은 도덕적인 기준이 매우 높았고, 그러한 기준을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학교가 아닌 내가 원하는 학교로 진학했던 아들은 그곳에서 몇 명의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들의 언행이 아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는지 언제부턴가 그들을 멀리했다. 그 이후로 그 친구들의 괴롭힘이 시작된 것 같다. 1학년 2학기 말 쉬는 시간에 화장실로 향하는 아들을 몇몇 친구들이 따라가 위협했고, 아들은 그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들에게 분노한 상황이 있었다. 다행히 아들은 중학교 입학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 온 덕분에 덩치가 상당히 컸고 힘이 무지 셌다. 하지만 아들의 착한 심성 때문인지 상대방을 먼저 친다거나 위협한다거나 하지는 못했다. 아들은 화장실까지 따라온 그들을 향해 화장실 문을 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 뒤로 교실에서 더 마음의 문을 닫게 되어 학교에서 하교할 때까지 어느 누구와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아이는 점점 스스로의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 무렵 아들은 힘든 하루를 마치고 나와 함께 밤마다 동네를 함께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시간들이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


이후 아들은 운동에 몰두했다.

몸이 커지면, 강해 보이면,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3이 되어서도 공부보다 운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말도 했다.

뚱뚱하거나 약해지면 다시 상처받을까 두렵다고 했다.

이해는 갔지만, 입시는 현실이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3월 말, 생활복이 작아져 새로 사러 가는 길에

나는 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체대를 가고 싶어도 공부가 먼저야.”

“사교육을 그렇게 했는데 왜 결과가 이러니?”

“지방대 갈 거면 엄마가 왜 이렇게 투자했겠니?”


나는 완벽주의에 성과주의적인 사람이다.

나도 알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점을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게 바뀌진 않았다.


그날 이후, 아들은 나와 거의 모든 접촉을 끊었다.

내가 출근 전에 항상 싸주던 아침 간식도 가져가지 않았고, 아침밥도 먹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조차 나를 피했다.

나는 너무 괴로웠다. 처음에는 아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내 생일이 다가오고. 난 너무 마음이 복잡해 그날 당일 예약되는 템플스테이에 갔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종을 치며 나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종소리를 들으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정말 가슴이 아려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아들을 괴룝혔는가.

그동안 아들은 나에게 얼마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가.

아들이 아닌 세상의 기준과 잣대에 아들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는가.

아들의 인생보다 내가 자식 자랑 하고 싶어서 아들을 거기에 맞추려 하지 않았는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휴직을 하지 못했다.

휴직을 하고 싶었지만, 회사 사정상 불허가되었다.

아들 반 남자아이 기준 워킹맘은 나 포함해서 딱 2명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은 유치원보다 빨리 끝나 난 학교 끝나고 바로 학원가는 스케줄 잡기 바빴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다.

입학 후 며칠 뒤 아들이 나에게 말을 했다. ‘엄마, 나도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살펴봤더니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학원 가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노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엄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들 간식 챙겨주고, 서로 이야기하고... 이런 모습을 아들이 몇 번 봤나 보다.

마음이 쾅 내려앉았다.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아들에게 학교 끝나면 수학 문제집 몇 페이지까지, 국어 문제집 몇 페이지까지 풀고 엄마한테 연락해라란 말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방학이 되었다. 방학이 문제였다. 할머니가 바로 앞 동에 사셔서 봐주시긴 했지만, 할머니 본성 자체가 밖으로 다니시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스타일이라 집에서 아이들 돌보는 게 적성에 안 맞는 분이셨다. 그래서 난 아들을 9시부터 시작하는 바둑교실을 다니게 했다. 바둑교실 끝나면 바이올린 레슨, 그거 끝나면 초등학교 저학년이 다 해야 한다는 태권도, 그거 끝나면 피아노, 미술, 수학, 논술.... 그래서 내가 퇴근할 때쯤이면 아이도 모든 일과가 마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짰다.


아들은 바둑을 너무 가기 싫어했다. 바이올린도 재미없다고 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또 듣지도 않은 채 무조건 내 생각하는 데로 아들을 밀어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아들이 나에게 차 뒷좌석에 앉아 ‘바둑 싫어. 재미없어’, ‘바이올린 싫어. 힘들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그걸 하나의 투정으로 여겼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 건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고등학교 진학 시에도 아들은 집에서 가까운 학교, 중학교 친구들이 많이 가는 학교로 가고 싶어 했지만 내 나름대로 내신 성적 따기가 조금 더 수월한 학교로 진학을 시켰다.


고등학교 2학년 진학할 시기에 선택과목 선택할 때 아들은 사회탐구 하고 싶다고 했지만 또 나의 생각대로 과학탐구 해야 한다. 이과 해야 한다는 나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아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과학탐구로 과목을 선택했다.


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10년 넘게 경험하다가 이제 더 이상 못 참게 된 것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내가 너무 미웠고,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아들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