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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유진 Feb 05. 2021

어느 죽음에 대하여

M이 죽었다. 


M은 내가 보육원에 와서 처음 본 아이였다. 저녁 늦게 도착한 보육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온통 어둠이었는데, 그 암흑 속에서 호리호리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녀석의 그림자는 어림 열 살 정도 되어 뵀다. 

"싸와디카!"

라고 인사를 건네자 녀석은 기절할 듯 낄낄거리다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뒤 히죽 웃어 보이곤 다시 암흑 속으로 비틀비틀 사라졌다. 마치 환영처럼.


다음날 만난 녀석은 수줍음이 많은 보통의 아이였다. 다만 이따금씩 처음 만났을 때처럼 광적인 환희 속에 걸어다녔다. 녀석은 본드 중독이였다.


첫인상이 워낙 강렬해서였는지 나는 M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수염이 날까말까 하는 녀석에겐 이미 강아지같은 귀여움은 없었기에 오고가는 손님들에게도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린 상태이기도 하고, 솔직히 본드에 취해 있을 때의 녀석은 좀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나의 관심을 대단히 소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별 일 없을 때에도 자꾸 이름을 부르고, 녀석이 혼자 떨어져 앉아 있으면 조용히 옆자리에 가서 앉는 식으로 말이다.


보육원 방문 3년쯤 되었을 때, 아이들과 헤어지기 전날 밤 각자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원체 찌질한 나는 역시나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작별인사를 했다. 울음은 그쳤지만 훌쩍거림이 오래가서 아이들 보기 민망해 구석 쪽에 가서 앉아 있었더니, M이 슬금슬금 오더니 내 옆에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벽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불편한 자세로 녀석은 내 훌쩍거림이 그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다가, 내가 조용해지자 역시 한 마디 없이 어색하게 퇴장했다. 나는 그 때 아이들은 관심을 가져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열어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내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흉내내어 나에게도 위로를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녀석의 본드 중독은 여러 해가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열댓 살쯤 되었을 때 M은 동네 비행청소년들 모임에 들어가서 귓볼에 100원 동전짜리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어느 날 보육원의 한 아이에게서 느닷없이 페이스북 전화가 걸려 왔다. 회의 중이었던 나는 황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는데, 욘석이 눈치 없게 끊으면 바로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눈치 없게. 느린 태국어 타자로 '회의 중임' 을 적고 있을 때 셀카 고자 앵글로 콧구멍이 훤히 보이게 찍은 사진이 도착했다. M이었다. 


"내 일해로감" 

"일해로간 누나"


사진 밑으로 해독 불가능 수준으로 맞춤법이 파괴된 메시지들이 쌓였다. 두 세 개의 메시지 이후 녀석은 작문은 포기했는지 음성 메시지를 몇 개 보내왔다.


회의가 끝나고 음성 메시지를 열람해 보니, 일을 하러 보육원 밖으로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어렸고 아직 본드도 끊지 못한 상태였기에 말려 보려 급히 회신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연락을 받은 휴대폰 주인은 M이 이미 원을 나갔음을 알려 주었다.


녀석은 왜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오죽 가출한다는 얘기를 할 데가 없었으면 천리 밖에 있는 나한테 연락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안쓰럽고 미안하였다. 왜 하필이면 회의 중에 전화를 해 가지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나름 잘 자립하나 싶던 녀석은 몇 년 후 감옥에 들어갔다. 약물을 하다가 잡힌 모양이었다.

녀석은 지난 해 돌연 보육원으로 복귀했다. 형을 다 산 것이었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M은 분명 말썽쟁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누가 생선이 먹고 싶다 하면 금방 저수지에서 고기를 낚아 오고, 손님이 아이스크림이라도 줄랍시면 어린 동생들에게 늘 나누어 주는 따뜻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우리는 모두 그의 따뜻한 마음을 믿었다. 그렇게 M은 보육원에서 농사 담당을 맡았다.


서너 달 정도 매일 채소를 키우며 지내던 녀석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녀석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대안교육을 제공하는 센터에 다음 달 이동하기로 했다. 


그 때였다. 오랜 친구 A가 나타난 것은.


어릴 적부터 M과 붙어 다니며 어른들의 골치를 깨나 썩혔던 녀석은 방콕 주변 소도시에서 먼 친척이 하는 빵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간만에 놀러 왔으니 며칠 재워 달라던 녀석은 그 며칠 간 M을 설득했다. 월급도 없는 이곳에서 썩지 말고 목돈을 벌러 함께 도시로 떠나자고 말이다. 이제는 스물을 훨씬 넘긴 나이가 되었으니 일하러 가겠다는 녀석을 붙잡을 특별한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M은 떠났다.


이후 녀석이 A의 친구 무리와 몰려다니며 매일 술독에 빠져 산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근태는 좋아 처음에 간 공장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는 소식에 언젠가 철이 들면 술을 줄이고 다시 돌아오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갑작스레 걸린 독감에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 출근한 토요일 오전이었다. 차를 한 잔 타 마시며 회의실에 앉아 있는데 스탭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M씨가 자란 보육원이죠?"

"네, 그런데요."

"혹시 M씨 가족이나 친척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친척이 없는데요. 무슨 일이신가요?"


M이 한 시간 전에 만취한 상태로 술을 사러 나갔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이미 CPR을 세 차례 시도했으나 심정지 상태이다. 가망이 없어 보이니 산소호흡기를 뺄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탄식은 무거운 적막이 되었다. 전화를 받아 들고 옆 방으로 나간 원장님의 잠긴 목소리가 문 틈을 비어집고 들어와 우리의 가슴을 때렸다. 그렇게 M은 우리를 떠났다. 아니, 우리가 녀석을 떠나보냈다.


"저기, 계세요?"

아이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러 방문한 봉사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 무거운 적막을 깼다. 모처럼 좋은 일 하자고 보육원에 왔는데, 사람들이 전부 인사도 않고 먼 산만 보고 있으니 웬 박대인가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일어나 봉사팀을 미소로 맞이했다. 식사 준비하시는데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나는 웬지 화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라 내 미소가 어딘가 일그러져 있지 않을까 겁이 났다. 썩 좋지 않은 시간에 도착한 손님에게 화가 난 것인지, 나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마신 M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우리는 모두 혼자 와서 혼자 간다고 했다. 그래서 죽음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죽음은, 다른 죽음들보다 서글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서글픔은 망자가 아니라 후회하는 남은 자의 몫이라는 것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윤동주, 서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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