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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길 Mar 18. 2022

팥쥐 이모

세상 부끄럼 없는 양 시치미를 뗀 40대 여인.

꼭 팥쥐 이모 같다.

콧대와 목과 손과 발, 그 모두를 곤두세운 일이

결국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뻗뻗한 손가락질인 것을 모르는 양.

또한 더 뻔뻔스레 신경을 곧추세우는 것도.

꼭 집문을 열어두고, 괜히 도둑 걱정에 쫓기는 것 같다.


그녀는 저를 지켜보는 사람과 눈이라도 마추치고 싶었나 보다.

그래야 존재 이유를 느끼는 것이라며,

안심이 된다며 눈초리를 바삐 움직거린다.

세상은 그리 서둘러 바라볼 이유가 없을 텐데,

전철 안 움직임 하나하나 모두를 기억하려는 듯했다.


흥, 그것은 또한 그대의 착각이겠죠.

내릴 곳에 대한 즐거운 확인,

점점 그곳이 다가오는 시간 확인 과정에 불과한 걸요?

어찌 누가 누구에게 쫓긴단 말을 하는 거죠?

시간에 쫓긴다고요?

그것은 마찬가지죠.

이미 정해진 시간 내에 움직이는 것.

자신의 시간이나 생각과 뭐 좀 다르다고

억지춘향 한가지로 몰아 세우진 마세요.


말인즉 그랬다.

그러나 그럴지도 모른다.

서로는 서로에게

자신의 뜻과 시간을 알맞게 꿰맞추려 하고 있는 것일는지.

성격에 따라 가족 관계에 따라

시간이 서로 다르게 움직인다는 걸 강조하려나 보다.


사람마다 하는 일들, 만나는 사람들, 갈길 등등이

서로 다른 거 아닌가요?

그래서 자기 몸,

자기 눈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일이야 당연하지 않나요?

후후. 당신 갈 길이나 눈 크게 뜨고 정확히 보세요.

남 보고 뭐라는 건 낭비죠.

삶의 낭비.


전철문 가까이 멈칫거리던 팥쥐 이모.

문이 열리자, 다시 한 번 전철 안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있었던 자리 느낌을 간직하려는 듯.

문이 닫히고 전철이 움직였다.

내 시간이여 잘가란 양, 팥쥐 이모 치마가 서둘러 흔들거렸다.

세상과 시치미 떼듯

자기 길을 또렷하게 자기 시간에 맞추려는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 시간 찾듯.

내 길과 나란히 놓여있는지 다시 확인하듯.

그 순간 나를 꼭 밟고 있어야 하듯.

나의 움직임을 느껴야 했다.

이리저리 휘둘러 보는 전철 안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냥, 내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순간, 툴툴 자리에 일어났다.

그랬다, 이 순간, 나도 팥쥐 이모였다.



<후기>


청소년 시절, 학교 때 성선설과 성악설이란 단어를 배웠었다. 

최근 이들 단어가 양손을 오가며 서로 내가 맞다고 춤추는 것을 느낀다. 

어느 때, 어느 곳에 따라 나는 손을 치켜들고 있음을 또 느낀다. 

콩쥐니 팥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 

누가 좋고 나쁜 것 또한 누구에게 맞고 틀린다. 

다만, 내 스스로 좋은 느낌을 더 유지하려 노력할 뿐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이는 결국 나쁜 느낌이 순간 자신을 움추리게 한다. 

이것이 나 스스로 내 상처를 만들고, 이것을 덮느라 가면을 쓰곤 한다. 

그러나, 가면을 쓰지 않고, 나를 보시라, 

활짝 보이는 일이 즐거움임을 우리는 잘 안다. 

팥쥐 이모는 결코 자신을 가리지 않았다. 

가린 것은 내 손바닥이었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것은 결국 말장난이었다. 

먹고 살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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