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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Aug 25. 2022

[서평, 리뷰] 로마로 가는 길

구름에 달 가듯이 걷는 로마 길

  내겐 로마와 커다란 악연이 있다. 원데이 렌즈를 무리하게 떼 내다 생긴 심각한 각막 출혈로 인근 대학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은 후 애꾸눈 잭이 되어 남은 여행 일정을 간신히 마쳤다. 이 책을 통해 7년 남짓 되어가는 이 악연을 해소하기 위해 언젠가 나도 작가처럼 로마로 가는 길을 온전히 걸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을 갖게 되었다.


  로마로 가는 길을 뜻하는 비아 프란치제나는 산티아고 길에 비해 인프라가 열악하다. 순례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프랑스길 루트에 비하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나름 불편하다고 평가되는 포르투갈길 루트에 비해서도 조악한 듯하다. 저자가 걸은 루카 – 로마 코스가 비아 프란치제나를 대표할 이탈리아 구간의 하이라이트이지만  안내 표시가 부족하고 하루 일정 중에 보급하거나 쉬어갈 곳 마땅치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당연히 편의 시설과 묵을 숙소가 여의치 못하다. 물가 역시 차이가 꽤 나서 순례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이처럼 날 것의 느낌이 물씬 풍기고 트레킹 하기에 부적해 보이는 비아 프란치제나는 역설적으로 순례객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상당히 제공한다. 자신도 모르게 겹겹이 둘러 씌웠을 가식의 허물을 가감 없이 벗어내어 오롯이 민낯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심연의 나신을 드러내게 해 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성지순례길은 배고픔, 목마름, 피로, 배출의 욕구까지 무엇이든 한계 직전까지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마주했다. 어느 정도까지 인내심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작렬하는 태양 아래 마실 물이 떨어지고 행동식이 여의치 않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어 원치 않아도 내면의 깊이를 보여준다. 저자 부부가 아닌 다른 순례객들이라면 달랐을까? 순례 경험이 많고 트레킹에 익숙한 이들일지라도 큰 차이가 없을 거라 추측된다. 그만큼 걷기 인프라가 최적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내외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고 지칠 때마다 교통편으로 점프할 유혹에 빠지곤 했다. 다행히도 순례길을 수호하는 천사가 나타나 끝까지 도보로 완주하도록 격려해주었다. 30번 코스에서 만난 스베아는 같이 택시를 타고 힘든 구간을 넘어가자는 작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는 오로지 걷기 위해 이 길을 떠나 왔어.” 그녀가 작가에게 해 준 말이다. 그러면서 부부에게 로마까지 반드시 걸어갈 것을 신신당부하기까지 한다. 이 대목에서 내년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를 하며 동행할 누나를 배려한다는 핑계로 피레네 산맥을 넘을 2일 차에 배낭 하나를 동키로 보낼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남은 배낭은 내가 짊어지겠지만 걸을 때 필요 없을 무거운 짐은 동키 편에 보내게 되니 걷는 고행이 줄어드는 데 마치 칼도 뽑기 전에 집어넣을까 주저하는 무사와 다름없다는 느낌에서다. 작가 부부는 12일째에 버스로 이동을 해야 했다. 일정상 종착지에 묵을 숙소가 없어 다음 날 목적지까지 버스로 가서 숙박을 한 다음 되돌아와서 배낭 없이 걸었다. 배낭 하나 벗었을 뿐인데 죄책감이 들어 그렇게 마음이 무거웠단다. 마음이 찔려 누나에게 여쭤보니 동키를 쓸 생각이 전혀 없단다. 누님의 굳은 의지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우리 남매는 37일로 예정한 순례 일정을 죄책감 없이 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자면 남부 유럽 국가들의 공통된 정서를 체감하게 된다. 바로 사람 사는 ‘정’이다. 밀라노, 베네치아, 제노바 같이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기질적으로 독일인과 비슷한 면이 많은 듯하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차갑게 느껴진다. 작가가 출발한 토스카나의 루카에서 로마로 향해 갈수록 남유럽 특유의 오지랖 넓은 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작가는 지금 거주하는 베네치아보다 로마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하다고 하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탈리아를 달랑 13일만 경험한 내가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영화 ‘웰컴 투 사우스’ 때문이다. 영화에서 밀라노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남단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오지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러나 막상 카스텔라바테로 징계성 전출을 당한 주인공은 남부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 현지인들과 친해진 끝에 남부 이탈리아의 정취에 흠뻑 매료된다는 줄거리이다. 영화 내내 남부 시골의 아름다운 전경에서 우리네 남해안을 떠올렸다. 


  우리나라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렇다. ‘끈끈한 정’, ‘한’, ‘다이내믹한 민족성’, ‘삼천리 금수강산’. 어릴 적 유신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20대까지 한국만큼 아름답고 인정 넘치는 곳이 없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었다.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단견이었는지! 남유럽도 우리네 못지않은 인정이 넘치고 아름다운 풍광과 문화유산이 곳곳에 들어차 있다. 토스카나의 자부심 시에라와 피렌체, 전문 사진작가도 욕심 낸다는 소도시 산 퀴리코 도르차, 이탈리아에서도 손꼽는 캄포 광장과 시에라 대성당, 단테가 지옥의 거인이라 부른 몬테리 지오니 성의 망루. 우리네 문화유산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탈리아를 조상 덕분에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를 끊임없이 지켜내려는 후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문화 강대국은 없었을 것이다. 경주 국립박물관을 공사하다 발견한 신라 유적과 청계천 복구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조선 초기의 귀중한 유물을 단지 공기 준수를 이유로 적당히 묻고 덮어 버리는 우리가 반면교사해야 할 일이다.


  작가는 토스카나의 안개 낀 구릉과 너른 벌판을 보면서 정지용의 ‘향수’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토스카나 산 지미냐노와 몬탈치노의 무성한 포도밭과 인상적인 와이너리 사진에서 나는 박목월의 ‘나그네’를 조그맣게 되뇌었다. 남도 삼백리 외줄기 길을 구름에 달 가듯, 타는 저녁놀처럼 술이 잘 익어가는 마을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토스카나의 절경을 걸었던 작가 내외의 모습이다.


  작가가 당초 예정했던 여정은 10일 200km, 라디코파니까지였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부부는 로마까지 400km를 걷기로 계획을 바꿨다. 처음 목표보다 일정을 배로 늘린 이유는 그만큼 비아 프란치제나를 걸으며 무언가 위로받았던 데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그로부터 연유한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임시방편으로 이탈리아 여행 체험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를 확보하자는 취지로 떠난 순례길이었다. 그런데 순례를 하며 어머니와의 소중한 여행을 기억해냈고 코로나로 아등바등했던 스스로를 반추했으며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에 숨통이 조여왔지만 유튜브에서 ‘즐거운 척 행복한 척’ 타인을 의식한 플렉스에 종국에는 울음을 서럽게 토해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허물을 벗게 되자 마침내 그녀는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 내어 로마로 가는 길에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 말대로 ‘로마로 가는 길은 너무 고달파 눈물이 나고 그만하겠다고 선언만 하면 되는 길인데 걷다 보면 계속 나아가야 할 길이 명확하게 보이고 매 순간 포기하고 싶으나 편안하기 위해 떠나온 길이 아니었기에’ 불편한 날 것이 가득한 이 길이야말로 그녀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작가가 인용한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의 한 구절,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애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가 어울리는 길이 바로 비아 프란치제나이다. 이 길이 더 다듬어져서 날 것의 생명력을 잃기 전에 이탈리아 구간 1,020 km를 오체투지 하듯 나를 던지며 걸어보고 싶다. 


  그간 순례길 기행을 다룬 대여섯 권의 서적을 읽었다. 책마다 작가가 강조하는 집필 방향이 조금씩 달라 어느 하나가 더 낫다고 하기 애매하다. 각자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로 가는 길'은 최소한 문장력에서 가장 낫다는 평가를 할 만하다. 소설에서 접할 수 있을 만한 묘사와 비유가 두드러진다. 논리적인 글에 자신있는 나로서는 흉내내기 힘들 정도다. 순례길을 걷는 생동함있고 아름다운 문장을 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꺼내들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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