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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1. 2020

서른 살 생일에 떠난 남미 여행

그 시작은 갈라파고스

한국 나이 스물둘, 삼류 씨름 선수였던 나는 부상으로 일찌감치 경쟁에서 탈락하였다. 죽어라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고, 이듬해에 시험에 합격했다. 내 인생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퀘스트가 있는 컴퓨터 게임 같았고, 레벨업을 위해 지루한 사냥을 반복하듯 삶은 지난한 인내와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아 연달아 두 번의 승진을 이뤘고, 몇몇의 부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현장직에서 양복 차림의 청사 사무실로 옮겨 출근을 했다. 근무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지각없이 6시 30분 출근을 준수했다. 토요일도 당연하게 회사에 나왔고, 퇴근 시간 후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카톡을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명확히 부여된 과제를 해내는 것이 게임의 당연한 규칙이었기에, 정작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면 도무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늘 당황하곤 했다.      


한국 나이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여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기회가 되어 일단 여권을 만들자마자 늦바람이 불어 들이닥치는 대로 여행을 다녔다. 짧은 기간에 필리핀, 캐나다, 미국을 여행하게 됐는데, 세상 구경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라면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회사에서 장기 해외파견업무 모집공고가 났다. 계약조건 중 연 45일의 휴가보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운이 좋아 최종선발이 되어 중동 사막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홀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어서 빨리 연가 사용 조건이 충족되기만을 기다리며 외로운 타향살이를 버텨냈다. 나의 남미여행은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설날이자 나의 만 서른 번째 생일날 시작되었다.       

  

‘갈라파고스‘에 대해 전해들었던 거라곤 ’다윈 진화론의 발상지‘라는 교과서 같은 지루한 내용뿐,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또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려했던 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남미 여행을 준비하며 어쩌다 읽은 여행 안내서의 한 줄의 문장이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없는 지상 낙원”     


6주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일정에 갈라파고스를 포함 시켜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일반적인 루트는 페루부터 시작하여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를 거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끝나는 일정이다. 브라질을 통째로 빼버리고 나머지 국가의 뻔한 일정도 과감히 삭제하여, 결국 일주일간 갈라파고스에서의 시간을 확보했다.      


출발 전, '남미 사랑'이라는 인터넷 카페에서 동행을 구했다. 마침 운 좋게 비슷한 날짜에 그곳에 가기로 한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이 또 동행을 데려와 결국 남자 둘 여자 넷의 다채로운 청춘들이 갈라파고스에서 만나게 되었다.      


필요한 물건들을 아무리 꼼꼼히 챙겨 봐도 왠지 중요한 무언가를 빠트린 것만 같아 배낭의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6주라는 긴 시간 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형체 없는 불안감이 마음에 짙게 드리웠다.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무려 세 번의 환승을 거쳐 약 36시간 만에 갈라파고스 발트라 공항에 도착했다. 준비한 스페인어로 승무원에게 고작 "그라씨아스"(감사합니다.) 따위의 인사를 건넸는데, 놀랍게도 그 간단한 단어 하나에 벌써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낯선 두려움이 제멋대로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여권에 갈라파고스 입국 도장이 '땅'하고 찍히자 내 마음은 이미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찼다. 작은 공항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옮겨주는 수화물을 받아 들고 셔틀 버스에 올라 항구로, 배를 타고 산타크루즈 섬으로 이동한 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마을로 이동했다. 차창 밖에는 햇살을 잔뜩 머금은 풀잎들이 마치 우리를 환영한다는 듯 기분 좋게 흩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구글 맵을 보고 미리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다. 낮은 담장과 하얀색 대문을 가진 집에서 작은 키의 까무잡잡한 원주민 아주머니가 순박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틀 동안 씻지 못한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함께 여행하게 될 동행들을 기다렸다. "이쁠까?" 란 호기심이 먼저 들었고, "어색하면 어떡하지?" 란 근심이 뒤따랐다. 마치 새로운 학교에서 자기소개를 준비하는 전학생처럼, 그 기다림은 설렘보다는 초조와 불안에 더 가까웠다. 신기하게도 그들과 조우하자마자 그런 긴장은 눈 녹 듯 사라지고 수다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막내인 소정이는 이제 갓 23살이 된 대학생, 쬐깐하고 씩씩한 현아는 얼마 전 퇴직한 간호사였고, 나랑 비슷한 또래인 경민이는 대학원생이었다.      


저녁때가 되어 동생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나는 마을에 나가 맥주와 빵을 샀다. 퉁퉁 불은 스파게티와 시원한 맥주로 첫 만남을 축하하며 잔을 부딪힐 때 조심히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제 생일이에요.“     


어색한 공기 사이로 멋쩍은 웃음과 말들이 오고 갔다. 어찌 됐건 여자 셋에 둘러싸여 생일을 축하받은 것은 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시작이 참 좋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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