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u, huaraz
와라즈는 해발 3,090미터에 위치한 페루의 고산 도시이다. 우리가 에콰도르령인 갈라파고스 산크리스토발에서 출발하여 와라즈까지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 한번, 버스 4번을 환승하여 무려 이틀에 걸친 대장정을 거쳐야 했는데, 남미 여행자들 사이에 빡세기로 악명이 높은 와라즈의 69호수 트레킹을 경험하기 위해 이 말도 안 되는 여정을 순순히 감내했다.
트레킹 하루 전날 오전에 도착하여 투어를 예약하고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고산 환경에 몸을 노출시켰다. 숨이 조금 가빠졌고 가슴이 조금 뻐근했다. 고산 탓인지 걱정 탓인지, 심장이 꽤 두근거려 늦게까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귀찮아 씻지도 않은 부은 눈을 비비며 숙소 앞으로 픽업 온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 아저씨는 등산 시 주의사항과 와라즈의 역사 따위를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로 또 한번 설명했지만 이른 시간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졸았다. 2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려가 목적지 근처 식당에 내렸다. 고산 예방효과가 있다는 코카차와 샌드위치가 포함된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500ml짜리 생수를 한 통 샀다.
오전 9시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전날 잠을 설치긴 했지만 가슴이 조금 답답한 것 외에 특별한 고산 증상은 없는 듯 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꽤 쌀쌀히 불어왔다. 신록이 우거진 광활한 초원과 투명하게 흐르는 맑은 계곡물이 보였다. “공기가 참 맑구나.” 청명한 고산의 찬바람이 텁텁한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렸다.
목적지인 ‘69호수’는 해발 4,500미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라산이 1,600미터인 것을 감안해보면 엄청난 높이다. 왕복 10km에 대략 5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출발하기 전 고도를 확인해보니 시작점이 3,800미터 지점이다. 정상까지 고작 700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좀 만만해 보였다. 혹시나 고산으로 인한 두통이 올까 봐 최대한 숨을 천천히 고르며 한 걸음씩 정성껏 대지를 밟았다. 다행히 등산로는 원만했다. 넓은 평야에는 소들이 제각각 흩어져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마지막 삼십 분 정도를 남기고 급격히 경사가 높아졌다. 숨이 너무 가빠 겨우 세 걸음을 못 가 허리를 숙이고 거친 숨을 골라야 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했다. 이게 저질 체력 탓인지 고산 증상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덧 눈 덮인 산봉우리 아래로 에메랄드빛의 신비한 호수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 풍경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와 대박!! 쩐다.”
눈 덮인 안데스의 끝자락에서부터 녹은 눈발이 폭포가 되어 힘차게 흘러내렸고, 그것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호수는 옥빛의 영롱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단지 바라만 봤는데도 참아왔던 갈증이 날아갔다.
호숫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전날 미리 싸두었던 간식과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곧 동행들이 잇달아 도착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69호수 트레킹을 고산 증상 때문에 중도 포기한다던데, 우리 일행(여자 4명)을 포함해서 버스 승객 30명 중 낙오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증샷을 찍기 위해 얼음이 녹은 차가운 호수에 들어가 포즈를 취했다. 그런 나를 보고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진을 찍으러 앞 다퉈 따라 들어왔다. 잠시 후 가이드 아저씨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버스에서 호수에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줬었는데 왜 말을 안 듣냐며 주동자인 나를 무섭게 혼냈다. (영어 잘 못해서 못 알아 들은건데 ㅠㅜ)
내려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 나중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땅이 질어서 신발은 이미 진흙 범벅이 되었다.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버스가 얼른 마을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는데, 갑자기 한기가 돌고 머리가 아픈 것이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갈 때는 숙소까지 데려다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이미 체크아웃을 해 버린 탓에 추가 비용을 내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렇게나 누워 쉬고 싶었지만 야간 버스를 타고 리마로 넘어가야 했기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다른 동행들은 사막 지역인 이카로 이동했고, 나는 리마를 거쳐 쿠스코로 이동해야 했기에 마지막 저녁 식사를 끝으로 급하게 헤어졌다. 일주일 동안 매일을 웃고 떠들며 같이 고생한 친구들이었는데, 살갑지 못한 성격 탓에 따뜻한 인사는커녕 헤어짐의 서운함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스스로가 한심했다.
혼자 걷는 발걸음이 낯설었고, 비를 머금은 어둠이 유난히 깊었다. 또다시 강행군을 헤쳐나갈 생각에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서둘러 리마 행 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