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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1. 2020

세얼간이의 마추픽추 정글 트레킹

feat. 히딩크의 어퍼컷

리마를 환승해 쿠스코에 도착했고, 필리핀 어학원에서 룸메이트였던 현 캐나다 유학생 종직이와 동갑내기 친구인 형수를 만났다. 형수는 마추픽추와 우유니 사막을 가고 싶어 굉장히 무리를 해 휴가를 냈고, 방학기간인 종직이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와 동행할 예정이었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를 가기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중 ‘정글 트레킹’을 선택했다. 마추픽추 아래 위치한 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까지 미니 밴을 타고 이동하며 중간에 자전거 라이딩, 짚라인 등 액티비티를 즐기는 투어였다.(2박 3일 일정)     


모처럼 만난 친구들이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69호수 트레킹을 끝마친 이래로 계속 컨디션이 나빴다. 술을 마시러 가자는 종직이와 형수를 뒤로한 채 먼저 숙소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고요한 새벽 세 시, 영문도 모른 채 번쩍 눈이 떠졌다. 마취가 풀리듯 갑작스레 뭔가 스르륵 밀려오더니, 복통이 파도처럼 급습했다. 고산병인 줄 알고 고산병 약을 먹었고, 몸살인가 싶어 몸살 약까지 먹었는데 이제는 설사까지 하다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복통 없는 설사는 처음이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세균성 장염이라고 했다. 잠복기가 72시간이라니 아마 와라즈 트레킹 중 먹었던 참치마요 주먹밥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다. 그렇게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사경을 헤매다 날이 밝았고, 나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몸을 질질 끌며 겨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 말고도 국적 모를 외국인 그룹들이 동행했는데, 대충 조를 나눠 미니 밴 두 대에 몸을 구겨 넣었다. 우리는 칠레에서 왔다는 구릿빛의 라틴 아메리카 미녀들과 한 버스를 타게 되어 잠시 환희와 설렘으로 들떴지만, "웨어 아유 프롬?“ ”아임 프롬 사우스 코리아.“ ”리얼리?" 따위의 의례적 대화는 불과 세 번의 핑퐁을 넘기지 못했다. 선천적 아웃 사이더인 우리는 그 어색함에 기가 눌려 버스 구석 창가로 고개를 돌린 채 지루한 이동을 견뎌야 했다.


푸르른 차창 밖 풍경





출발할 때 그렇게 맑았던 하늘이 산 중턱을 넘자 갑작스럽게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급기야 비까지 내렸다. 첫째 날은 안데스 산맥을 가르는 아찔한 도로 위에서 즐기는 자전거 라이딩이 메인이었는데, 나는 자전거 안장으로 전달될 엄청난 충격과 그로 인한 대형 참사를 고려해 결국 라이딩을 포기했다. 하지만 무서워서 하기 싫다던 친구들을 억지로 구슬리고 윽박질러 겨우 데려 와놓고 정작 나는 텅 빈 버스에서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있으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종직이는 "며칠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꿈을 꿔서 찝찝해요." 라며 오는 내내 투덜댔었는데, “남자가 고작 그런 걸 무서워하냐" 핀잔을 줘가며 강제로 데려오지 않았던가.      


그들이 출발하자마자 비는 더욱 거칠어져, 창밖을 타닥타닥 두드리던 빗방울이 이제는 그것을 부술 듯이 무섭게 때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가득한 하늘 
준비 중인 형수와 종직
차창 밖으로 비치는 친구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목적지에 먼저 도착한 나는 하루 종일 쌓인 걱정과 근심들을 화장실 변기 위에 비워 낸 후 멋쩍은 웃음으로 친구들을 맞았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지만, 도착한 친구들의 옷과 신발은 이미 축축이 젖어 차가웠다.

           

식당으로 이동하였는데, 마침 다른 팀 버스에 한국인 여자분이 계셨다. 예쁜 얼굴에 성격까지 밝은 인싸의 향기가 풍겼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여행지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걸까? 찐따들이 으레 그렇듯, "저 여자분 귀엽게 생겼는데 몇 살쯤 됐을까?" “니가 가서 이따 맥주 한 잔 마시자고 말 걸어봐.” 등 그녀에게 가닿지 않을 시시껄렁한 말들을 시정잡배들처럼 내뱉으며 히죽거렸다.      


마침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녀가 식사를 마친 후 우리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장염 때문에 기력 없는 몸을 테이블 구석에 기댄 채, 그저 종직이가 그녀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 종직아 파이팅!')      


웃음꽃이 만발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종직이가 갑자기 “실례지만 나이가 몇 살이세요?”라고 초면에 나이를 물어보는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다. (‘저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27살이에요.” 그녀가 수줍게 대답했다.       


순간, 종직이의 오른팔이 마치 2002년 히딩크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연상시키듯 천장을 향해 힘껏 솟구쳐 올랐다.      


“앗싸 맞췄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혹시 제 나이 맞추기 내기하신 거에요? 제가 몇 살처럼 보였는데요?”     


당황한 얼굴로 정색을 하며 나를 심문하던 그녀 뒤에서 종직이는 “거봐요. 제가 20대 중반 맞다고 했잖아요.” 크게 지껄여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고, 그저 몸이 회복되는 즉시 종직이를 죽여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여행 중 그녀와 맥주를 마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가이드가 안내해준 온천에 갔다. 특별할 것 없는 노천탕이었는데, 비가 내리니 안 그래도 뜨뜻한 수준에 머물렀던 탕이 차가운 빗물에 희석돼 점점 더 미지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추움과 따뜻함의 경계에서 수시로 바뀌는 마음을 확인하며, 인간의 결심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생각했다.     


숙소는 허름한 여인숙의 냄새가 났다. 종일 내렸던 비 때문에 매트릭스는 습기를 먹어 눅눅했다. 이온음료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하루 사이에 많이 쇄약해진 나는 비실대며 일찍 잠을 청했고, 종직이와 형수는 외국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새벽 2시쯤 방으로 돌아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역시 남미 여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같아.”  


“형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어 공부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늦은 밤까지 헛소리를 주고받던 그들은 급기야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냐고 관리인 아저씨를 깨우며 소란을 떨다가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약속된 집합시간이 됐음에도 종직이와 형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흔들어 깨워 빨리 아침을 먹으러 다녀오라고 하니 그 시간에 좀 더 자겠다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결국 가이드가 우리방에 찾아와 코레아 팀 왜 아직 안 나오냐고 재촉한 이후에야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짚라인을 타고 철길을 걸어 아구아스 칼리엔테(마추픽추  산 아래 있는 마을)까지 가는 날이다. 짚라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봤는데, 바람을 가르며 넓게 펼쳐진 풍경 위를 나는 기분이 꽤나 신났다. 한참을 올라가 지그재그로 네 번 정도 내려오자, 흡사 영화 실미도에서 684 부대원들이 훈련을 받았을 것 같은 아찔한 높이의 흔들다리가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첫발을 내딛기가 겁이 났지만 안전장치를 믿고 조심스레 건너가니 어느덧 목표에 닿았다.


집라인 타는 종직 군
중심을 잡기가 만만치 않다.
집라인 밑으로 흔들다리 지나가는 사람들

트레킹 장소를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기찻길에는 아구아스 칼리엔테 방향으로 가는 페루 레일이 지나다녔는데, 가격이 비싸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만 이용하기로 했다. 철로를 따라 약 세 시간을 걸어갔다. 딱히 힘든 길은 아니었지만 며칠을 굶은 상태에서 아쿠아 슈즈를 신고 자갈밭을 걸으니 조금씩 지쳐갔다. 단조로운 풍경은 지루했고, 마른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옆으로 지나갈 때는 무임승차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겨운 트레킹! 나도 기차 타고 싶다.
목적지인 아구아스 칼리엔테 마을 도착!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네 슈퍼에서 다음날 마추픽추에서 먹을 샌드위치와 간식을 샀다. 계산을 하려는데 총무를 맡은 종직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 이틀 전 일주일 치 공금을 걷었는데 지갑에는 간식 조금 살 돈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숙식은 이미 지불한 투어비에 포함된 상황이라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게다가 나는 삼일 만에 밥 한 끼를 겨우 먹었다...)      


멘탈이 붕괴된 종직이는 어디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당황스러워 했다. 하지만 나중에 계산을 해보니 지들끼리 술 마시고 담배를 사는 데까지 공금을 사용하여 돈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종직이가 캐나다에서 회계학을 전공한다고 해서 여행 시작 전부터 총무 걱정은 덜었다며 좋아했었는데, 막상 여행을 시작해보니 이놈은 허당 중의 허당이었다. "공금으로 담배를 사는 놈들이 어딨냐" "형도 간접 흡연했으니 같이 핀 거에요." 언성을 높이며 밤늦게까지 다투다가 다음날을 기약하며 그냥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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