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에서는 주로 스쿠버 다이빙과 스노우클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각자의 섬이 고립된 채 진화한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생명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어느덧 갈라파고스에서의 일정도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오후 3시 비행기라 오전의 일정이 비었음에도 아침 일찍 절로 눈이 떠졌다. 소중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내기는 아쉬워 이름도 어려운 물레 띠헤레타스(Muelle tijeretas)라는 곳까지 조깅을 하기로 했다. 전날 비행기가 취소되어 하루 더 머무르게 되었기에 의도치 않게 생긴 일정이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판 반바지와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은 채 상쾌한 마음으로 조용히 호텔 문을 열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동네는 아직 잠들어 있는 듯 고요했고, 유난히 짙고 푸른 하늘은 전날 비를 내린 흔적을 지우려는 듯 태양을 높게 드리웠다. 어제와는 다른 숨겨진 마을의 모습을 잠든 일행들 몰래 나 혼자서 한꺼풀 더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놀랍도록 평화로운 이 장면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치 세상이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적당히 숨이 차기 시작할 때쯤 공원 안내소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출근을 안 해서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기에 스스로 방문자 명부를 작성한 뒤 전망대를 향해 뛰었다. 그 와중에도 고요함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표지판을 볼 필요도 없이 그저 계속 높은 곳을 향하다 보니 그렇게 높지 않은 곳에 전망대가 있었다.
푸른 바다와 해안을 감싸고 있는 빽빽한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생명의 진화가 시작된 태초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이 그대로 몸을 누이고 있었다. 천천히 다시 돌계단을 걸어 내려와 여기저기 퍼질러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물개들을 조심스레 피해 바다에 풍덩 몸을 던졌다. 물 밑에서 물개 한 녀석이 다가오더니 내 옆을 인사하듯 스쳐 지나갔다. 한참 물장구를 치고 놀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자갈밭에 누워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옆에서는 어미 물개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조용히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파도가 자갈에 스미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살갗에 닿는 그 선선함이 참 좋았고, 이 천국 같은 곳에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묘한 흥분과 희열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추상적이기만 한 행복의 모습을 내게 종이에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쩌면 그날 아침의 풍경이 아닐까?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마른하늘에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행들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온몸으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호텔까지 뛰어갔다.
‘오늘도 비행기가 못 뜨면 어떡하나...‘라는 염려와 달리 비행기는 제 시각에 정확히 이륙했다. 기상악화로 틀어진 일정, 그래서 선물처럼 주어진 특별한 하루. 그 하루로 인해 오히려 내 인생에 행복한 추억이 하나 더 쌓일 수 있어 감사했다.
대한민국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제주도를 닮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동물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곳에서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종들 간 공존의 이상향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나의 서른 번째 생일에 대해서 물어봐 주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때 갈라파고스에 있었어"
쏟아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