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16. 발렌시아를 떠나 그라나다로(11.17)
일요일 아침 먹기
아침 일찍 짐을 다 싸고 식사를 하기 위해 나섰다. 호텔 예약할 때 조식 포함 선불을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출발 날 조식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을 연 카페가 없다. 보통 7시면 여는데 8시가 넘어서도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아! 그렇지. 토요일은 밤늦게 장사하고 일요일은 늦게 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허술한 카페를 발견하고 들어가니 우리 같은 여행객들이 커피에 햄 치즈 크라상을 먹고 있다. 다른 선택도 없어 같은 메뉴를 주문해 아침을 때웠다.
450 킬로 미터 8 시간 버스 여행
그라나다까지 8시간 여정이다. 발렌시아 버스 정류장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정류장은 시내에서 본 아름다운 건물과 다르게 엉성하다.
버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발렌시아 - 베니돔 - 알리칸테 - 무르시아 - 그라나다 – 말라가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다. 우리도 중간에 타서 중간에 내리는 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0 킬로 8시간을 타야 한다. 아내는 무릎과 화장실 걱정을 한다.
베니돔과 알리칸테 정류장에서 정차 시간이 짧아 우리는 화장실 다녀오느라 바빴는데 같이 탄 현지 승객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각자 가져온 샌드위치를 내서 오물오물 먹고 난 뒤 그대로 앉아 있다. 이 사람들은 버스 탈 때 먹거리를 가지고 타는 모양이다. 매우 이상했다. 왜 화장실을 가지 않지?
그런데 우리가 촌사람 짓을 했다. 화장실이 설치된 버스였는데 보지 못했다. 전에도 화장실 달린 버스를 탄 적이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는 화장실이 버스 뒤 편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버스 중간 출입구 계단 오른쪽에 설치되어 그것이 화장실인지 몰랐다. 종종 사람들이 계단 옆에 내려가 있어 다리 펴느라 그런 줄 알았다.
안달루시아의 황량한 평원 그리고 석양의 장관
버스는 발렌시아에서 알리칸테 까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간다. 한적한 도로가 이어진다. 햇빛에 잔잔하게 반짝거리는 바다가 보인다. 해안을 따라가다가 내륙으로 들어가면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르시아,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비야 모두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속한다.
안달루시아 지역에 들어가면서 평원에 올리브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꼭 평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험한 산세가 나타난다. 19년 전 이 길을 내가 운전하며 가족과 함께 지나갔을 텐데 길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알리칸테에서 잠시 내려 점심 먹고 포장된 해변을 걸어본 기억만 남아 있다.
무르시아를 통과하자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석양의 낙조를 받은 들판과 산 그리고 광활한 하늘에 펼쳐진 구름이 만들어내는 색의 아름다움이 장엄하다. 차 속이라 그 장엄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쉽다. 그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아 두는 수밖에.
마음속에 아련한 서러움이 인다.
밤비 오는 그라나다
밤 8시 그라나다에 도착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라나다가 가까워지자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스페인 거리는 오래된 건축물이 많아 비가 오면 유별나게 을씨년스럽다. 그런데 밤 비라니 왠지 기분이 가라앉고 으슬으슬하다.
그라나다 버스정류장에 8시 조금 못된 시간에 내린 후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가랑비는 내리고 조명이 어두운 도로를 지나가며 느끼는 우중충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호텔이 있는 구시가로 들어오니 다행히 가로등이나 상가 조명이 환하고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여행객 들일 것이다. 그 분위기가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한다. 아내가 우산은 챙겨 왔다.
골목길 속 뜻밖의 예쁘고 청결한 호텔
택시 운전사에게 호텔 이름을 대니 위치를 바로 인지하는 것 같다. 구시가 어느 골목길 호텔이다. 호텔을 물색할 때 알람브라 궁전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을 택했다.
그런데 택시 운전사가 거의 막다른 골목 언덕에 내려주고 도착했다고 한다. '호텔은 어디에?' 하고 말했더니 좌측 골목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호텔이 보일 것이라고 한다. 가랑비 맞으며 백팩 메고 가방 들고 계단 길을 조금 올라가니 왼쪽에 손바닥만 한 뜰을 둔 팔라시오 산타 이네스 호텔(Hotel Palacio Santa Ines)이 있다. 3성급 호텔이다.
세월을 담은 무거운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지 않은 리셉션 로비가 보인다. 옛날 저택을 개조한 호텔 같은데 조촐하고 예쁘장한 로비가 나온다. 내정을 로비로 만든 것 같다. 입구에서 느꼈던 첫인상이 싹 가신다.
복층 방이다. 1층은 침실과 화장실 2층은 거실인데 1인용 침대도 있다. 모든 장식이 아랍 문양이다. 욕실 세라믹 장식도 아랍 문양과 디자인인데 인상적이다. 내부가 매우 청결하며 포도주가 선물로 놓여 있다.
침실과 거실이 분리되어 오르고 내리는 것이 조금 불편하지만 일단 2층으로 올라오면 정리된 감이 있고 산만하지 않아 글쓰기가 좋다. 아주 마음에 든다. 70 유로 호텔 비용에 이 정도 품질 이라니.
배 고프고 국물 음식이 그리웠던 아내
아내는 배가 고프다. 아침 식사를 대강 하고 점심도 버스 정류장에서 산 샌드위치를 버스 안에서 먹고 먼 길 왔으니 그럴 것이다. 눈치가 따뜻한 국물을 먹었으면 한다. 한국 출발 후 현지 음식만 먹었다. 얼큰한 국물이 간절할 것이다. 버스 속에서 혼잣말로 그라나다 도착하면 중국 음식점을 찾아볼까 했는데 귀 밝은 아내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 중 우리 음식을 크게 그리워하지 않는다.
호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내는 짐은 나중에 정리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자고 한다. 시간도 9시여서 서둘러 나왔다. 플라자 누에바(Plaza Nueva) 광장까지 걸어 내려오니 식당이 많다. 그런데 거의 아랍풍이 가미된 스페인 음식들이다. 나는 아랍 음식은 향이 있어 좋아하지 않는다.
썩 내키지 않아 구글 맵으로 중국음식점을 검색해 보니 모두 2 킬로 미터 밖에 있다. 광장 코너에 버거 킹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대충 때우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중국 음식점에 가고 싶은 것이다.
낮에 버스 속에서 한 혼잣말을 듣고 '아! 오늘은 중국 음식이구나.. 좋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내는 신혼 때부터 자기에게 유리한 말은 잘 기억해 두는 습관이 있다. 눈 빛을 보면 아는데 무관심하게 듣다가 눈 빛이 순간 반짝하면 메모리 된 것이다.
표현은 안 하지만 아내의 몸동작을 보니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늘 밤 좋게 편하려면 가자' 하고 택시를 잡아서 구글 맵에 나온 식당을 찾아갔다. 허술한 중국 음식점이다,
아내는 완탕 수프 나는 아그리 피칸테(신맛 매운맛) 수프를 시키고 본식은 새우 볶음밥과 매운 마파두부를 시켰다. 물론 따뜻한 중국차는 아내가 '떼 치노(Te Chino!)' 하고 미리 시킨다. 스페인어도 자기가 필요한 말은 대충 할 줄 알고 어떤 때는 나보다 빨리 알아듣는다.
나는 알람브라 입장권을 온라인으로 구입해야 한다. 돋보기 쓰고 핸드폰 작은 글씨를 식당의 간접 조명에 비춰가며 개인 정보를 입력하느라 식사할 시간이 없다. 아내는 입장권 구입하는 것은 남편 일이고 자기는 먹는 것에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뭐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매운 소스를 가져오라고 하여 수프에 듬뿍 쳐서 맛있게 먹는다. 매운 소스도 '타바스코 말고 중국 고추 씨앗 기름(Tabasco No! Picante chino con aceite!)'이라고 확인해 준다. 자기가 필요한 스페인어는 잘 구사한다.
내 수프가 식어 간다. 아내에게 '내 수프도 먹을 수 있으면 먹어... 입맛이 없네' 했더니 '그래?' 하고 사양하지 않고 먹는다. 일부러 그렇게 시켰다. 수프 좀 먹이려고. 그랬더니 이제 속이 풀어진다고 한다. 마파두부도 맵게 시켰는데 볶음밥과 잘 비벼 먹는다.
알람브라 입장권 구매가 다 끝나고 식사를 하려니 정말 입맛이 달아났다. '못 먹겠네. 당신 먹지 그래' 했더니 '배 부른데...' 하며 더 먹는다. 오늘 아내는 배도 고팠고 따뜻한 국물이 무척 먹고 싶었다. 하여튼 속풀이를 잘 한 샘이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라나다의 가랑비 내리는 낯 선 밤길에서 어렵게 택시 잡아타고 누에바 플라자 광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버거 킹에 들려 가장 간단한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알람브라 궁전 입장권 구매 소동
산타 이네스 호텔 체크인할 때 매니저가 알람브라 궁전 입장권을 구입했는지 물어봤다. 내일 매표소에서 구입할 거라 했더니 깜짝 놀란다. 입장권은 매표소에서 판매하지 않고 알람브라 궁전 홈페이지에 들어가 온라인 구매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일정이 급하고 매진되면 못 구하는 수도 있단다.
알람브라 궁전 오는 것이 이번이 네 번째인데 온라인 구입을 해 본 적이 없다. 처음 두 번은 온라인 구입이란 것이 없었고 2년 전에는 패키지여행이어서 여행사가 단체로 구입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번에 그것을 알지 못했다. 실수다.
한국에서 마요르카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해 이베리아 항공, 톨레도와 세고비아 가기 위해 렌페, 그라나다와 부르고를 가기 위해 알사(ALSA) 홈페이지를 접촉해 봐서 아는데 스페인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표를 구입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잘 돌아가지 않는 홈페이지에 절차가 복잡하고 지불 방식도 개인정보를 적지 않게 입력해야 한다. 갑자기 난감한 기분이다.
중국음식점에서 아내 식사를 주문해 주고 알람브라 홈페이지를 접속해 봤더니 다음 날 월요일은 오후 4시 30분 이후 입장권 밖에 없다. 화요일도 오후 1시 30분 이전 입장권은 없다. 1시 30분 입장권도 잔여 분이 49표 밖에 남아있지 않다.
식사를 하지 못하고 핸드폰 작은 글씨를 돋보기 쓰고 구매 작업을 시작했다. 정말 복잡하고 많은 개인 정보를 반복해 요청하고 있다. 인내가 필요하다. 입장료를 신용 카드로 지불하는데 갑자기 패스워드가 헷갈린다. 맞겠지 생각하고 넣은 패스워드가 틀린 모양이다. 오류 메시지가 뜨면서 지불 불능이 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돌아 버리겠다. 우리나라 카드사를 접촉해 다시 패스워드를 설정한 뒤 온라인 구매를 시작한다. 참을성을 가지고 한 시간 가량 노력하여 입장권 2매를 겨우 구매했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와 피곤한 데다가 입장권 구매로 신경을 잔뜩 쓴 탓인지 입맛이 삼천리나 달아났다. 음식도 이미 식었고 먹히지 않는다.
호텔 매니저가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알람브라 궁전 입장하지 못할 뻔했다. 그러면 그라나다 여행이 속말로 팥소 없는 찐빵 된다.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