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스페인 가을 여행(20)

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by 기현서

17. 깊어가는 가을 속 그라나다(11.18)


호텔 아침 식사


호텔 아침 식사가 매우 정갈하다. 호텔 규모에 맞는 크지 않은 식당에 마련된 식사는 질이 높고 무엇보다도 식자재가 고급이다. 하몬을 보면 안다. 얼마나 고급 하몬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다른 재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빵도 맛있다. 다양한 빵을 가져다 놓았다. 그 외 베이컨, 햄과 치즈, 과일 등 부족한 것이 없다. 주스도 모두 자연산이다. 아주 충분하게 아침 식사를 한다.


아랍 문화가 배어있는 아기자기한 도시


그라나다 방문은 이 번이 네 번 째이다. 그러나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시내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 것은 이 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지도가 별로 의미 없다. 돋보기를 쓰고 봐도 지도에 나와있는 글씨 보기가 쉽지 않다. 목표지역을 찾아갈 때 필요하면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대충 간다. 가다 보면 좁은 골목길을 헤매게 되고 뜻밖의 도시의 숨겨진 풍경들을 청량한 아침 햇살과 함께 만나게 된다.


도시는 전날 떠나온 발렌시아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규모, 문양, 색감 등이 크지 않고 아기자기하다. 아랍 문화가 배어 있음을 느낀다.


북아프리카 즉 현재의 모로코를 중심으로 거주했던 아랍계와 베르베르족 후손인 모로족(Los Moros: The Moors)이 스페인을 800년 동안 지배했다. 모로스(Moros)는 검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아마 피부가 검은 사람들 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라나다는 그들의 마지막 왕국인 나스리드의 최후 거점 도시이다. 카스티야 왕국(Crown of Castilla)의 이사벨라 여왕은 아라곤 왕국(Kingdom of Aragon)의 페르디난드 2세와 결혼해 힘을 키운 뒤 1492년 나스리드 왕국의 보압딜이라고 불리는 무하마드 12세를 굴복시킨다. 그라나다에서 항복을 받는다. 이 항복으로 이사벨라 여왕은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를 완수하고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다. 보압딜은 항복 후 울면서 알람브라 궁전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바로 그 여왕이다.


그래서 그라나다를 포함한 안달루시아 지역은 아랍 문화가 많이 배어있다. 이곳의 주민들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로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화의 영향은 매우 강해 건축, 조각, 의류, 종교, 음식 등에 아주 깊게 베어서 이어지고 있다.


아내가 골목길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장신구 가게에 정신을 팔고 있다. 눈요기를 하며 '어머' 하며 감탄한다. 디자인이 너무 독특하고 예쁘며 가격도 저렴하단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차고 다닐 일이 없다. 그냥 눈으로만 보라고 하지만 어데 여자 마음이 그러한가? 어느 한 가게 쇼 윈도에서는 꼼짝도 안 한다. 은제 반지를 가리키며 한 번 차 보려고 하니 들어가서 얘기해달라고 한다. 사겠다는 얘기다. 20 유로 조금 넘게 지불하고 구입했다.


아내는 은 반지를 보고 또 보고 한다. '뭘 그렇게 차고 싶을까? 나이 들며 오히려 하나 둘 버려야 할 판에'. 속으로 '아이고' 했다. 그러나 한 편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표현으로도 느껴진다. 몸과 마음이 아프면 그런 생각 자체가 나지 않을 테니까. 그라나다는 아랍 문화 영향이 강해 금은 세공이 발달해 있다.


잔잔하게 깊어가는 그라나다의 가을


지도에 나와있는 명소들을 걸어서 찾아다닌다. 그라나다 대성당, 산 제로니모 수도원, 플라자 누에바, 콜론 광장, 그라나다 대학, 산 니콜라스 전망대 등.


목표 지역만 정하고 길을 묻거나 또는 애플 지도 맵을 켜고 걸어 다니면서 그라나다의 가을을 온몸으로 느꼈다. 날씨까지 받쳐준다. 맑은 햇살에 약간 찬 듯한 공기가 매우 상쾌하다.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곳에 숨어있는 광장과 카페 그리고 그곳에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사람들, 모퉁이 과일 가게에서 시장 보는 사람들, 수다 떠는 젊은이들 모두 맑은 햇살, 노란 낙엽과 함께 잔잔한 가을을 느끼게 한다.


발렌시아의 가을이 아름다운 건물에 비친 황토 빛 햇살에서 느껴졌다면 그라나다의 가을은 도시의 전체 풍경이 합하여 느낌을 전달한다. 사람들의 표정도 급한 것 없고 느긋하다 못해 나른한 느낌이다. 발렌시아에서 느꼈던 약간의 소란스러움도 없다. 그 조용함 속에서 그라나다의 가을은 잔잔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문어 구이 점심


골목을 걸으며 사진 촬영 꺼리를 찾는데 아내가 갑자기 나를 부른다. 가보니 골목길 중간 모퉁이 아담한 식당 앞에 설치된 메뉴 간판을 보며 손가락으로 한 메뉴를 가리킨다. 새끼 문어 구이 메뉴이다. 그 식당의 추천 메뉴로 되어 있다. 아내는 여행 출발 전부터 문어 요리 얘기를 했다. 그래서 마드리드에서 문어 요리를 먹었다. 또 먹고 싶은 것이다. '왜, 점심으로 먹고 싶어?' 하고 물었더니 웃기만 한다.


두어 시간 돌아다니다가 1시쯤 기억을 더듬어 다시 그 식당을 찾아가서 문어 요리를 시켜 주었다. 대단히 만족하며 먹는다. 먹는 입을 보면 안다. 먹으며 문어는 칼로리가 높아 저녁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의 메뉴(Menu of the Day)를 먹었다. 가장 저렴한 세트 메뉴다. 아내가 먹은 메뉴의 반 값도 안된다. 10.5 유로에 전식은 수프 본식은 숯불에 구운 닭고기 후식은 멜론이다. 양도 적당하고 맛과 청결함 모두 소홀하지 않다. 절약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고 과거 마드리드에서 근무할 때 점심을 주로 오늘의 메뉴를 먹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내는 정말로 저녁을 먹지 않았다. ' 나가서 하몬에 맥주 한 잔 할까?' 하고 한 번 유혹했는데 안 먹겠다고 했다. 뱃살 찐다고. 먹고 싶으면 혼자 나가서 먹으라고 한다. '좀 찌면 어때. 봐줄 사람도 이제 없는데' 하고 말했다. 아내가 배시시 웃지만 싫어하는 말이다.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본 역광 속 알람브라 궁전


지도에서는 니콜라스 전망대로 표기되어 있다. 무엇을 전망한다는 걸까? 그라나다 도시 전체를 전망할 수 있는 곳이러니 생각했다. 점심 식사 후 애플 맵을 켜고 찾아간다. 웬걸. 투숙하고 있는 호텔에서 5분 더 올라간다. 호텔을 잘 선택했다.


전망대는 넓은 광장이다. 카페가 크게 자리 잡고 있고 거리의 화가들과 이상한 악기를 가지고 구슬픈 노래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뭇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며 가을이 잔잔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전망대는 내 생각과 달리 알람브라 궁전의 뒤 쪽을 보는 곳이다. 알람브라 궁전이 높은 언덕에서 등을 보이고 있다. 역광이다. 궁전 등 쪽이 어둡다. 그러나 파란 하늘과 하얀 구룸을 배경으로 한 알람브라 궁전의 어둑한 풍경도 가을의 잊지 못할 정취이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고 있다. 정물화같은 적막감이 흘러 갑자기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아내가 내게 잔 돈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왜?' 하고 말했더니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싶다고 한다. 동전을 찾아보니 없다. 지폐밖에 없다고 했더니 5 유로 달라고 한다. '그렇게 많이?' 했더니 노래하는 남자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멀리서 보고 있단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하고 물었더니 육감이라고 하네.


연주가 끝나고 아내는 지폐를 그 사람 앞에 놓인 모자에 놓아둔다. 멀리 있던 아낙네가 웃으며 연주가에게 다가온다. 연주자도 웃는다. 아내의 육감이 맞았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본질은 어데나 다 똑같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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