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20. 유행 살짝 지난 옷 깨끗하게 잘 차려입은 노인 같은 부르고스 (11.21)
가랑비 오는 부르고스를 걷다
어젯밤부터 오고 있는 가랑비가 계속되고 있다.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가 낮다. 어디로 가야 할까?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동서남북도 가늠을 못한 체 호텔을 나섰다. 스페인 도시 특성은 중심광장으로 플라자 마욜(Plaza Mayor)이 있다. 때때로 명칭이 다를 수도 있지만 본질은 같다. 광장 주변에 성당과 주요 정부 청사 그리고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우선 그쪽으로 가면서 도시를 보면 된다. 그것이 정석이다. 지도를 보니 플라자 마욜과 성당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호텔을 나와 앞에 있는 아를란존(Arlanzon) 강변을 따라 서쪽 방향으로 조금 걸어갔다. 엘 시드 광장이 나온다. 엘시드가 말 타고 비를 맞고 있다.
비가 내리고 있어 배낭 메고 우산 들고 사진 찍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춥고 바람 불며 비가 오는 아침 길에 오가는 사람들도 뜸하다. 그러나 내가 여행자이니 비 내리는 도시를 걷는 것도 여행의 일부다. 불편하지만 굳이 불만할 수는 없다. 내가 날씨를 어떻게 하겠는가? 싸늘한 냉기가 얼굴과 손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느껴진다.
도시는 우중에도 조촐하게 보인다. 꼭 유행 살짝 지난 신사복을 색깔 잘 맞춰 깨끗하게 차려입고 나온 노인을 보는 것 같다. 그라나다에서 올라오는 길에 다시 본 마드리드의 압도하는 대도시 풍경과 크게 대비되었다.
오가며 만난 사람들의 차림도 튀는 것이 없이 얌전하고 점잖다. 물론 표정도 그렇고 말도 다소 무뚝뚝하다.
썰렁한 플라자 마욜 광장
플라자 마욜 광장은 썰렁했다. 비 내리고 차가운 바람 부는 날 아침 누가 광장을 나오겠는가? 광장이 시가지 중심이라 출근하는 사람들이 네모난 광장의 상가 도로를 오갈 뿐이다. 아내는 웅크리고 걷는다. 문 닫히고 불만 켜진 상가를 기웃 거리며. 또 딱히 다른 짓을 할 수도 없다.
플라자 마욜은 대체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다. 광장에 심어진 나무들도 보기에 단정하다. 오는 도중 길목에서 본 도시 풍경의 느낌과 같다. 군더더기가 없다.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지만 지방 도시로 안정감 있고 차분하다. 내가 부르고스를 찾은 이유이다.
스페인 북쪽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그랬다. 19년 전 처음 왔던 이 도시에 대한 내 느낌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그 느낌을 기억하고 부르고스에 머물 계획을 세웠다.
웅장한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Burgos)
플라자 마욜에서 대성당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당이 고딕식 건물이라 뾰족하게 나온 성당 건물이 골목 사이에 얼핏 보인다. 그 방향으로 난 골목을 찾아 가면 된다.
성당 전면 산타 마리아 광장에 들어서니 입구 벤치에 순례자가 지팡이를 땅에 대고 비를 맞으며 앉아 있다. 청동으로 만든 조각이다. 문득 생각났다. 부르고스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 순례자들이 부르고스 대성당을 거쳐 가는 것이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꽤 방문하는 도시다.
부르고스 대성당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규모도 클 뿐 아니라 동서남북에서 보는 대성당의 얼굴이 다르다. 햇빛이 있었으면 대성당을 보기 좋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련만 날씨가 받혀주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그래 비 맞는 대성당 사진이 또 어떼서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이다. 비를 맞으며 성당 외부를 찍는다.
대성당 내부는 매우 화려하고 조명이 아름답다. 신비한 느낌도 든다. 특히 아치형 복도에 조성된 조명이 아름답다. 그러나 발렌시아 대성당 내부의 화려함보다는 다소 못하다. 도시 규모 차이 일까? 그런데 부르고스 성당은 톨레도 성당, 세비야 성당과 함께 스페인 3대 성당 중 하나다. 사실 톨레도 성당도 그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세비야 성당은 또 다르지만. 하여튼 3대 성당으로 지목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그리고 화려하게 빛나는 채플들을 사진에 남겨 놓았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각 채플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경우 중요한 채플이구나 하고 가늠할 뿐이다. 아이폰 11 프로 울트라 와이드 앵글이 있어 좁은 채플에서 전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단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그들이 없는 순간을 확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아내는 성당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후각이 예민해 오래된 성당에 배어있는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 느낌이 올라온다고 한다. 또 비가오니 습기때문에 공기가 더 눅눅할 것 이란다. 그래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내가 꽤 오랜 시간 성당 내부에 있었다. 나오면서 아내가 짜증 낼 것을 예상해서 '미안해' 그랬더니 괜찮다고 한다. 오늘은 이상하네 하고 생각했다.
대성당 정면 광장 넘어 카페에서 커피 한잔
성당을 나와 앞을 바라보니 광장을 가로지른 정면에 카페가 보인다. 전등이 켜져 있다. 참 좋은 위치구나 생각하고 몸도 녹일 겸 들어갔다. 벽 여기저기를 화분으로 장식해 놓았다. 일견 촌스러움도 있지만 모두 살아있는 식물이라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성당 쪽에서 들어오는 입구 반대쪽 유리창을 넘겨 보니 바로 아를란존 강 위의 산타 마리아 다리(Puente de Santa Maria)가 얼핏 보인다. 커피 마시고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호텔 리셉션에서 받은 관광안내 지도를 보면 아를란존 강의 산타 마리아 다리도 중요한 명소로 표시되어 있다.
카페 안 좌석에서 유리창 너머로 대성당이 완전하게 조망된다. 비 오는 산타 마리아 광장과 대성당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산타 마리아 다리(Puente de Santa Maria) 그리고 파세오(Paseo)의 아름다운 길
광장에서 푸에르타 델 아르코(Puerta del Arco, 아치 문)를 통해 나오니 바로 산타 마리아 다리가 나온다. 그러니까 대성당 광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다리이다. 중요한 다리였을 것이다. 그 주변에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강변에 사람 전용 도로가 좁지 않게 조성되어 있다. 스페인에서는 이런 도로를 차도 옆에 있는 인도와 구분하여 파세오(Paseo)라고 부른다. 산타 마리아 다리를 기점으로 동쪽 파세오를 에스볼론(Esbolon) 파세오 서쪽 파세오를 라 이슬라(La Isla) 파세오라고 부른다.
가랑비가 흩날리지만 다리에서 보는 주변 풍경과 다리 주변의 여러 조형물 그리고 파세오 양편에 조성된 나뭇잎이 없는 가로수 풍경 들을 사진에 담았다. 햇살을 받으면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빗 속 풍경도 정취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빗 속의 부르고스를 헤매는 것도 좋은 여행 경험이다.
아내와 스와로브스키 귀걸이
오늘 점심은 카사 오헤다 레스토랑(Restaurante Casa Ojeda)에서 먹는다. 한국을 출발하기 전 이미 온라인으로 예약했다. 아내가 음식을 좋아하니 부르고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 있는 식당을 물색했다. 로운리 플래닛(Lonely Planet) 가이드 북에서 정보를 얻었다.
식당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내가 사진 한 컷을 촬영하고 뒤돌아 보니 아내가 또 귀금속 가게 윈도에 고개를 박고 있다. 경험상 자세가 수상하다. 아쿠아 마린(Aqua Marine) 색깔을 내는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거 49 유로인데 사주면 안 돼?' 한다. 자기가 결정하면 되는 거지 내게 물어본다. 출발할 때 새아기가 준 용돈도 있으면서. 결국 들어가 내가 카드로 지불하고 샀다. 아내 말은 자기가 좀 차다가 애들에게 준단다.
귀걸이 소재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다. 보통 크리스털에는 납을 넣는데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은 은을 넣어 더 반짝거린다.
카사 오헤다 레스토랑의 점잖은 음식을 먹다
1 층은 고급 제과점을 겸한 카페테리아이다. 이런 식의 카페테리아를 콘피테리아(confiteria)라고 한다. 이런 수준의 콘피테리아는 통상적으로 유명인사들의 사교장이었다. 손님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며 음료에 다과를 즐기고 있다. 1시 30 분 예약인데 조금 일찍 도착해서 콘피테리아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시간이 되자 종업원이 2층으로 안내해 준다.
오래된 식당이고 나름대로 고급스럽다. 장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예약을 했기 때문에 예약석으로 안내받았다. 의자 배치를 보니 마주보게 하지 않고 아내가 내 의자의 오른쪽에 않게 했다. 좋은 식당에서는 공간에 여유가 있을 때 의자 배치를 이렇게 한다. 대화하기가 훨씬 편하고 부드럽다.
전식으로 아내는 식당의 전통 수프, 나는 부르고스가 고향인 모르시야(Morcilla), 본식은 이 식당에서 잘한다는 소고기 구이를 시켰다. 아내는 토속 토기에 따끈하게 담겨 나온 야채, 소시지, 콩이 섞인 수프를 맛있게 먹는다. 양도 적지 않다. 나는 모르시야를 먹었다. 모르시야는 스페인식 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순대 직경이 크고 내용물도 당연하게 다르다. 먹기좋게 자른 순대를 앞 뒤면에 올리브 기름을 묻힌 뒤 후라이 팬에 구워 나온 것 같은데 바삭하면서 촉촉한 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며칠 전 마요르카에서 먹은 맛과 엇비슷하다. 맛있다. 본식인 미디엄으로 알맞게 잘 구워진 소고기를 소금을 손으로 비벼서 뿌려가며 맛있게 먹었다. 적포도주 한 잔도 곁 들였다. 후식은 단 것을 시켜 엑스프레소 커피와 함께 먹었다. 풀 코스로 먹은 셈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아내는 오늘 저녁은 먹으면 안 된다고 다짐한다. 요 며칠 그 말을 지킨다.
부르고스 성(Castillo de Burgos) 우물을 보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부르고스 성을 지도와 애플 맵을 보며 찾아갔다. 성은 험하지는 않지만 지대가 다소 높은 곳에 있다. 배낭을 멘 탓인지 등산 기분으로 올랐다. 10 세기에 건설된 이 성은 19세기 초 프랑스와 전쟁 시 크게 파괴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비수기라 방문객도 뜸하다. 매표소 직원이 국적을 물어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안녕' 하고 인사한다. 봄에 한국인 순례자가 많이 온단다. 인사말만 그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지하 우물 방문 마지막 시간이 4시 15분이라고 해서 성을 대강 둘러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들어가는 사람이 우리 부부밖에 없다. 가이드와 지하 터널로 들어갔다.
우물은 성의 식수원이었다. 깊이가 67 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우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1492년 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를 완수한 이사벨라 여왕이 말년에 남동생의 딸인 조카와 왕권을 두고 내전을 치른다. 이때 여왕은 우물로 향하는 터널을 뚫어 성에서 농성하는 조카를 공격했다고 한다. 식수원을 고갈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사벨라 여왕은 컬럼버스를 후원해 미주대륙에 도착하게 한 군주이다.
이사벨라 여왕은 우물을 향해 5개의 터널을 팠다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 물론 성에서도 대항 터널을 파 들어가 양 진영이 터널에서 서로 만나 치열한 싸움도 했다고 한다. 실제 터널 바닥에 파 놓은 함정을 보았다. 함정은 쇠 창살 덮개가 있어 지나가며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터널은 5개 층 중 가장 높은 층만 방문이 허용된다. 터널을 통해 우물에 도달했다. 돌로 쌓은 둥근 우물탑이 보이고 탑에 난 네모난 구멍에 얼굴을 넣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저 멀리 물이 반짝거리며 보인다.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다.
성을 내려오며 전망대에서 부르고스 전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다행히 잠시 비가 그치고 해가 비쳐 좋은 사진을 얻었다.
아내의 스페인어 실력
우물에서 매표소 직원이 우물 역사에 대해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다 듣고 아내에게 설명해 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대강 알아 들었으니 설명할 필요가 없단다. 그리고 아내가 이해한 내용을 들어보니 대강 맞다. 터널 속에서도 가이드가 설명하는 것을 나름대로 알아듣고 있었다. 말은 알아듣고 소통하면 된다. 아내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 알아듣고 소통하고 있다.
부르고스 도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