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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현서 Oct 05. 2022

콜롬비아 내전 종식: 무장혁명군(FARC)과 평화협정

 2016년 6월 23일 콜롬비아 정부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하 무장혁명군)은 국내 28개 지역에서 무장혁명군이 무기를 내려놓기 위한 세부 계획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1964년 5월 조직되어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 무장 투쟁을 해온 반군 세력이 이제 무장 투쟁을 끝내고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다는 신호였다. 이로서 52년 동안 지속된 내전은 기술적으로 종식되는 시점에 진입했다.


 2012년 10월부터 시작된 양측 간 내전 종식을 위한 협상은 일단 2016년 8월 24일 타결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 타결은 국민적 저항을 받은 결과 2016년 10월 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50.22%로 부결되었다.


 산토스(Juan Manuel Santos) 대통령 정부는 국민투표에서 나타난 국민적 저항의 내용을 가지고 무장혁명군과 다시 협상을 재개하였고 같은 해 10월 13일 최종적으로 타결했다. 협정안은 11월 23일 보고타에서 양측이 서명하고 30일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협정으로 콜롬비아 내전의 가장 큰 축이었던 무장혁명군과 투쟁은 종식되었다.


 이 협상 성공의 정치적 의미는 콜롬비아 민주주의를 위협해 왔던 폭력적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것이었다. 콜롬비아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반정부 무장단체, 친정부 무장민병대, 마약 카르텔 그리고 정부군들이 야기하는 폭력으로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 상황의 근원이었던 반정부 무장단체와의 내전 종식은 대의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가 회복되는 시작이 되었다.


 콜롬비아는 인근 국가인 멕시코, 과테말라, 볼리비아, 페루 등에 비해 인디오 원주민 규모가 작은 지역이었다. 1500년 알폰소 데 오헤다(Alfonso de Ojeda)가 최초로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카리브 족(Caribs), 아라와크 족(Arawaks), 무이스카 족(Muiscas) 등 서로 다른 6개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있었으며 인구 규모는 약 4백만 명 정도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카르타헤나(1533년)와 산타 마르타(1535)에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한 뒤 1538년 곤잘로 히메네스(Gonzalo Jiménez de Quesada)가 산타페 데 보고타(Santafé de Bogotá)를 세웠다. 현재의 수도인 보고타이다.


 콜롬비아는 페루 부왕청의 지휘를 받는 총독부(Capitancy General)로 운영되다가 1739년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청(Viceroyalty of Nueva Granada)으로 승격했다. 그 통치 영역은 오늘날의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창설된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1819~31)가 붕괴하고 여기에서 분리 독립한 콜롬비아는 정치적 불안정 시기를 겪다가 1840년대에 자유당(Liberal, 1848)과 보수당(Conservative, 1849)이 창설되었다. 자유당은 자유무역, 연방제, 가톨릭 교회의 세속화 반대 등의 정치적 이념을 가졌으며 보수당은 보호무역, 중앙집권, 가톨릭 교회의 세속화 찬성 등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 두 세력은 서로 공방을 하며 끊임없이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충돌을 했다. 여기에는 무력 투쟁을 포함하고 있는데 19세기 중 콜롬비아에서 발생한 여덟 번의 내전 중 6개가 정당 간 무력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20세기에도 이어졌는데 1932년에 발생한 자유당과 보수당 간의 무력 투쟁은 결국 1948년의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 1948~58, 폭력)’라고 불리는 1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라 비올렌시아’는 1948년 4월 9일에 이듬 해 11월 대선에 나설 자유당 유력정치인 가이탄(Jorge Eliécer Gaitán)의 암살로 야기된 보고타 폭동(Bogotazo)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보고타 폭동에서만 약 5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어진 10여 년의 내전에서 당시 인구의 2%에 해당하는 20만 명이 사망하였다.


 ‘라 비올렌시아’가 종식된 뒤 자유당과 보수당은 앞으로 내전을 피하기 위해 ‘국가전선(National Front)’이라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통해 권력을 분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시스템은 양 정당이 교차로 대통령을 내되 내각은 양분해 차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 시스템은 ‘라 비올렌시아’가 끝난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전통적 양대 정치세력 간 대립은 70%이상 감소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반정부 무장단체가 결성되어 점점 세력을 확대해 가며 52년 동안의 또 다른 내전이 시작되었다.


 콜롬비아는 역내 여타 국가들과는 다르게 군부 쿠데타가 많지 않았다. 19세기 중 한 번 있었고 20세기에는 ‘라 비올렌시아’ 중 로하스(Gustavo Rojas)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가 한 번 있었다. 그는 당시 고메즈(Laureano Gómez) 대통령이 자신을 군부에서 축출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한 것인데 쿠데타 성공 후 1957년까지 군부통치를 실시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페론 대통령과 같은 형태의 정치사회적 개혁을 희망했으나 독재자로 불리며 자신이 속한 군부의 압박으로 사임하고  망명했다. 로하스를 축출한 군부 엘리트들은 정권을 일시 담당했으나 1958년 8월 국가전선에 권력을 이양했다.


 이 시기 즉 1960년대부터 태동한 좌파 게릴라 무장단체들은 점점 세력을 조직화하면서 정부군과 비정규전을 치루며 지배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무장혁명군(FARC), 국가 해방군(ELN), M-19 등이 대표적 좌파 게릴라 무장단체들이다.


 한편 지방의 전통적 지주들은 좌파 게릴라 무장단체의 준동으로 물리적 그리고 경제적 피해가 커지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 민병대 조직들을 만들었다. 개별적으로 형성된 민병대 조직들은 정부의 묵인 속에서 우파 성향의 콜롬비아 통합자위단(AUC)으로 확대 조직되었다.


 여기에 1970년대부터 메데인과 칼리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마약 카르텔들은 불법으로 코카인 제조와 유통을 하면서 각종 범죄와 폭력을 자행했다. 이들은 종종 좌파 게릴라무장단체 뿐만 아니라 우파 무장민병대와 협력과 반목을 하며 정부의 소탕활동에 저항했다.


 콜롬비아 정부군, 좌파 게릴라 무장단체, 우파 민병대, 마약 카르텔 등 간의  비대칭 전투는 21세기 까지 이어졌는데 이들이 일으킨 범죄와 폭력은 콜롬비아 정치 경제 및 사회에 심각한 수준으로 부정적 영향을 가져왔다. 특히 이들 간에 벌어진 무장투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인권유린이 자행되었으며 농민들의 디아스포라를 야기했다.


 2002년에 들어선 우리베(Álvaro Uribe, 2002~10) 정부는 민주적 안보정책(Democratic security policy)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은 테러와 반란을 통제하기 위한 마련된 대안으로 미국의 지원 받아 그의 집권기간 내내 실시되었다. 이는 무장혁명군과 국가 해방군의 활동을 일단 위축시키는 성과를 가져와 우리베 대통령을 이은 산토스 대통령이 무장반군과 평화협상을 개시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었다.


 우리베 대통령은 2006년 인권유린과 부패 등의 혐의로 비난을 받고 있었던 콜롬비아 통합자위단을 협상을 통해 해체하였다. 이들은 해체된 뒤 합법적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우리베 대통령을 이어 집권한 산토스(Juan Manuel Santos) 대통령은 2012년 8월 27일 내전 종식을 위한 무장혁명군과의 평화교섭 예비협상 실시를 발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자 간 타결된 협정안은 2016년 콜롬비아 의회 승인을 받아 발효되었다. 이로서 무장혁명군과 52년동안 계속된 내전은 종식되었고 산토스 대통령은 2016년 10월 국제적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집권기간 내내 무장혁명군과 강경 대치해왔던 우리베 전 대통령은 산토스 대통령의 평화협상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산토스 대통령을 비난하였다. 산토스 대통령을 이은 이반 두케(Iván Duque) 대통령은 우리베 전 대통령이 창설한 우파성향의 민주중심당(CD) 소속으로 산토스 대통령의 평화협상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우리베 전 대통령 보다 더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2022년 6월 대선에서 과거 좌파 게릴라무장단체 M-19에 참여한 적이 있던 좌파 성향의 구스타보 페트로(Gustavo Petro)가 승리한 것은 콜롬비아 정치에서 매우 역설적인 것으로 콜롬비아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잘 정착되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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