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남미 관계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연속성(continuity), 일관성(consistency), 변화(change)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전쟁(1775-1783)에서 승리하고 국가 체제 정비를 마친 19세기 초반부터 현재까지 시기별로 다른 국제 정치의 행동 원칙(prevailing rules of conduct)과 글로벌 현실(global realities)의 틀 속에서 그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양 지역 간 관계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1790년대~1930년대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원칙을 바탕으로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 정책이 실시되던 때이다. 이 시기는 유럽 국가들이 자원과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때로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중남미에서 영토 확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실행했다.
둘째 시기는 1940~80년대 냉전 체제가 유지되던 때로 미국 외교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 안보이었다. 미국은 중남미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정치 외교 및 경제적 역량을 집중하였다. 이 시기 중남미는 당연히 미국과 소련의 세력 확대를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셋째 시기는 1990~2000년대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일극 체제가 지배하던 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커졌지만 유럽과 일본의 경제 성장으로 미국의 경제적 영향은 감소했다.
넷째 시기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글로벌 테러와의 전쟁(Global War on Terror)’을 수행하던 때로 중남미는 미국의 글로벌 전략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이유가 되었다.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과 200여 년 동안 제휴, 동맹, 협력, 전쟁 등 다양한 형태로 역사적 사건들을 만들며 애증 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미국에 비해 모든 부문에서 압도적으로 국력이 약한 중남미 국가들의 대응은 제한될 수밖에 없어 대중영합주의적 민족주의에 치우치게 되었다.
제국주의는 한 국가가 자국 영토 밖 지역에서 토지. 주민, 자원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는데 필요한 정책, 관행, 주장의 총체이다. 유럽 국가들은 영토, 노동력, 자원 등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지정학적 위치를 선점해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15세기 이후 전형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왕성하게 추진했다. 특히 이들은 제국주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고상한 논리를 만들어 주장했다. 16세기 스페인의 ‘종교적 사명(religious mission)’, 18세기 프랑스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 19세기 영국의 ’ 백인의 책무(white man’s burden)’ 등이 그것들이다.
전 유럽적 규모로 치러진 30년 전쟁(1618-1648)을 종결하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이후 유럽 국가들의 지정학적 게임 법칙(rules of the game)은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이었다. 세력균형은 군비 증강, 영토 취득을 통한 국력 강화나 다른 강대국과 동맹을 체결하는 방식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력 균형은 15세기 중반 유럽 절대주의 왕정 경제 정책의 근간인 중상주의(mercantilism)와 함께 중남미 식민 지배를 지탱해 준 정치적 틀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그 명맥을 이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미국이 역내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할 때까지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에서 세력 균형과 중상주의 정책에 기반을 둔 이합집산을 하며 영토 확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왔다.
18세기 말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국가체제를 정비한 미국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과 ‘먼로주의(Monroe Doctrine)’를 내세우며 중남미에 대한 우선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 국가들과 필요에 따라 적대적 또는 우호적 협력관계를 병행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등 전형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헌법적 국가 안정을 이룬 1780년대 후반부터 중남미에서 유럽 열강들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경쟁에 나섰다. 당시 미국의 대외 정책 방향은 미주에서 유럽 열강들의 영향력은 축소되거나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남미와 그 자원이 미국 쪽에 있지 못하면 우리를 적대하는 쪽에 있을 것을 확신한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미국은 유럽 열강들의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 배제를 위해 단계적 전략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첫째 영국, 프랑스 등 신흥 유럽 강국들의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득권이 이들 국가로 옮겨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둘째 미국은 19세기 초 발생한 중남미 독립혁명전쟁에서 직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중남미 신생 독립국가들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제퍼슨 대통령은 ‘중남미 신생 독립국가와 미국의 목표는 유럽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다’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셋째 미국은 ‘명백한 운명’과 ‘먼로주의’를 내세우며 중남미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823년에 선언된 먼로주의는 당시 미국의 국력이 이 선언을 지탱할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미국은 중남미가 미국의 이해와 긴밀하게 연관된 지역임을 주장하면서 향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정치 외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먼로주의는 첫째 미국은 중남미 신생 국가들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고 둘째 유럽 열강들의 신생 국가들에 대한 식민화 의도를 반대하며 동시에 신생 국가들의 유럽 열강들과 동맹도 거부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미국이 중남미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중요한 외교 정책으로 운용해왔다. 이 외교 정책은 2013년 11월 미주기구 총회에서 존 케리(John Kerry) 미 국무장관이 ‘먼로주의 시대는 끝났다(Era of Monroe is over)’라고 공식 선언하면서 그 역할을 마감하였다.
이 시기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은 구체적으로는 영토 확장으로 나타났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 1822년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취득, 1845년 텍사스 합병, 1848년 미-멕 전쟁 승리 후 멕시코 북부 영토 취득, 1893년 파나마 운화 지배권 확보, 중미와 카리브 국가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간섭 강화 등으로 그 방식이 다양했다.
또한 구체적 제국주의 정책 실시를 합리화하는 대외 정책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과 ‘먼로주의(Monroe Doctrine)’를 배경으로 하는 빅 스틱 정책(Big Stick Policy)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의 실시로 중남미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저항이 커지자 미국은 이를 조정하기 위해 선린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표방했다.
미국의 중남미 외교 정책은 역내 국가들의 반미 정서를 일으켰다. 반미 정서는 정서적이고 수사적인 것이어서 구체적 전략이나 정책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내에서 ‘저항 문화(cultures of resistance)’를 형성하였다.
중남미 신생 국가들이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자(nationalist)는 반제국주의자(anti-imperialist)가 되고 반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은 당시 미국을 상정해 볼 때 자연스럽게 반미주의자(anti-american, anti-gringo, anti-yanqui)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침략을 경험한 멕시코, 쿠바, 니카라과 등 국가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그렇다. 반미 정서는 중남미 문화 내부에 깊게 자리 잡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냉전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우방국들이 동서 블록으로 나뉘어 대립하며 지정학적 긴장을 유지했던 시기를 말한다. 미국이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때부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가 이 시대에 해당된다.
국가 안보가 미국 외교 정책의 최고 목표가 되면서 중남미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의 전장이 되었다. 미국은 중남미에서 소련의 도전을 저지하고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반공 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은 우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역내 국가들과 정치 군사적 동맹을 강화했는데 역내 독재 정권과도 그들이 반공 정책을 추진하면 협력관 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좌파 정권이나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정권은 사정없이 분쇄하는 정책을 취했다. 1950년대 중반 중남미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 움직임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반공정책은 1980년대까지 중남미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축이었다.
1958년 닉슨 미 부통령이 중남미 순방 시 확인한 반미 정서와 1959년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 공산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낀 케네디 대통령 행정부는 10년 기한의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협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진보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을 실행했다.
또한 정치적 간섭이나 침공을 하기도 했는데 기간 중 과테말라 정치간섭(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공화국 침공(1965), 칠레 아옌데 좌파 정권 전복(1973), 그레나다 침공(1974), 콘트라 전쟁(1980년 대) 등이 주요 사례들이다.
1980년대 말에 발생한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동구 해방,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 강화 등 새로운 국제 질서의 광범위하고 신속한 전환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함께 불확실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기에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냉전 체제의 돌연한 종식을 가져왔다. 학자들과 정치가들은 냉전 종식이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종식된 1990년대 이후 국제 질서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에 대해 그 형태와 내용이 명료하지 않은 가운데 미국과 중남미 국가 간 관계도 당연하게 불확실해졌다.
우선 국제 정치에서 미국의 일극 체제가 유지되었다. 경제에서는 미국, 유럽, 동아시아 3극 체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념에 기초한 양극 체제가 사라진 뒤 민족, 종교, 마약 등 범죄 조직의 영향으로 발생한 분쟁이 계속되며 ‘게임 규칙이 상실된 시대(A time of without rules)’가 도래했다.
미국은 일극 체제의 초강대국 위치를 확보한 뒤 세계 경찰국가로 많은 국제적 이슈에 관여했다. 중남미에서도 미국은 정치적으로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사실상의 디폴트 패권국(default hegemony)이 되었고 중남미는 미국의 디폴트 뒷마당(default backyard)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 측면에서 훨씬 두드러졌다. 1950년 미국과 중남미 전체 인구는 비슷했으나 1990년에는 중남미 전체 인구는 436 백만 명으로 미국의 250 백만 명보다 75%가 더 많았다. 그러나 1990년 기준 국내총생산은 미국이 중남미 전체의 5배를 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58배, 브라질의 13배, 멕시코의 23배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미국은 중남미 외채 위기를 이용해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하여 정립된 미국의 경제체제를 중남미 국가들에 이식했다. 미국의 새로운 경제 체제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로 불리는 구체적인 경제정책으로 입안되어 중남미 전체 국가에서 실시되었다. 이 정책의 실시로 중남미 국가들의 상품과 금융 시장은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 개방되었다.
미국과 중남미 국가 간 상호 경제적 의존 관계가 더욱 깊어지면서 인적 교류도 크게 증가했다. 특히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 및 경제 사회적 어려움에 기인한 생계형 이민도 인적 교류 확대의 주요 원인이었다. 인적 교류 방식과 규모는 미국 이민 정책의 변화에 따라 시기별로 다르다. 인적 교류 증가는 시기적으로 긍정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마약 유통과 불법 이주라는 부정적 역내 이슈를 만들어냈다.
마약과 노동력에 대한 미국 시장의 수요가 계속 성장하자 중남미로부터 이 두 상품의 공급 역시 합법과 불법에 상관없이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행정부는 다양한 정책과 방침을 정해 이 상황을 대처해왔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정치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미국 일극 체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냉전은 이제 과거 역사일 뿐이었고 중미 내전도 종식되었으며 역내 국가에서 대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권 교체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2001년 1월 취임한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텍사스 주 출신으로 중남미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취임 직후 4월 캐나다 퀘벡에서 개최된 제3차 미주 정상회의에서 1994년 제1차 미주 정상회의에서 제안된 미주 자유무역 지대(FTAA) 창설 필요성을 강조하며 ‘미주 대륙의 세기’ 시작을 선언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취임 후 최초 해외 방문 국가로 멕시코를 선정하고 같은 해 9월 공식 방문해 폭스(Vicente Fox) 멕시코 대통령과 이민법 개혁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우호적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중남미 우선 입장은 2001년 9월 11일 사태가 발생하자 일순간 변했다. 부시 행정부는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 외교 정책의 최우선 사항이 되면서 미국과 중남미 역내 국가 간 추진되어야 할 이민, 통상, 불법 마약거래 등 여러 가지 이슈들은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9.11 사태를 기점으로 1990년대부터 이어져 온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geopolitics)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중남미 국가 지도자들은 9.11 사태 이후 미국 대외 정책의 축이 중동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간 것과 함께 중국의 부상, 북핵 문제 등으로 아시아에도 우선순위가 밀리자 이 상황을 위기(threat)와 함께 기회(opportunity)로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관심 축소가 경제 성장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항상 우려했다. 그러나 이제 9.11 사태로 인한 국제 정치 환경이 1990년대 지경학적인 것에서 지정학적인 것으로 전환되었고 미국의 대외 정책 우선순위도 변했기 때문에 중남미 국가들도 과거와 같이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만 의존하지 않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또한 그것은 미국의 중남미 패권에서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특히 중남미에서는 쿠바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권의 평화적인 교체가 정착되어 있었으며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권은 그 자체로 미국의 간섭을 제한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막이 되었다.
여기에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중남미 국가들은 과거 이라크 침공 때와는 달리 초기에는 우호적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에서 미군이 자행한 인권 유린이 밝혀지며 반미 정서가 확산된 것과 1980년대 말부터 시행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경제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가난한 다수를 양산시킨 것은 중남미 좌파 정권 출현과 확산의 배경이 되었다.
중남미 좌파 정권의 확산과 중국의 일차산품 수요 증가에 따른 수입 확대는 중남미에서 반미 정서 확산과 함께 중국의 부상을 가져오는 정지 경제적 토양이 되었다. 중국은 패권주의를 지양하고 공정하고 평등하며 호혜적인 관계 설정을 앞세우며 중남미에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중남미 국가들은 중국을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