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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넷 Jan 01. 2024

도파민 과잉의 시대

과정이 상실된 사회의 새로운 군상

 20대가 끝났을 때 아쉬움과 서글픈 마음에 생겼던 생채기는, 흉터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단단한 굳은살이 되어, 이제는 제법 아저씨라는 단어에 무덤덤해진 만 나이 서른둘이 되었다. 20대의 마침표와 함께 작별을 고해야 했던 2010년대는 나에게 마지막 낭만과 과정이 있던 시대였다. 그런 2010년대가 끝났다는 것은 낭만과의 안녕을 뜻하며, 단단해진 굳은살은 감성이 메마른 시대상에 맞춰 진화한 나를 설명해 준다.


1. 음악이 사라졌다.

 돈을 벌며 시작한 몇 안 되는 플렉스 중 하나는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에 가입한 것이다. 그와 함께 한 또 다른 플렉스는 유튜브 프리미엄에 가입한 것.

 20대의 나는 홀로 보내는 모든 시간을 음악과 함께했다. 3 Mbps 속도로 제한된 데이터를 사용하며, 데이터 소모를 줄이기 위해 음원 서비스를 이용해 엄선된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을 청취했다. 이마저도 과거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신보를 듣기 위해 발매일을 달력에 표시해 놓고, 레코드점에서 긴 줄을 감내해 가며 마침내 첫 소절을 들었을 때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가사집이 닳도록 가사를 외웠을 선대의 기억에 비하면 극도로 발전된 형태의 음악 청취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무제한 스트리밍이 가능해진 오늘날, 검색 한 번에 언제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더 이상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고, 노래를 듣기까지의 과정에서 ‘마침내’라는 숭고한 부사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홀로 있을 때 적적함을 달래주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였던 음악은, 유튜브라는 바다에 쉼 없이 넘실대는 시시콜콜한 농담과 수다들이 완벽히 대체해 주었고, 음악은 이제 나만의 소유물이 아닌, 언제든 듣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되었다.


2. 영화가 힘들어졌다.

 20대의 나를 돋보이게 해 주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영화였다. 선재아트홀, 아트하우스모모, 상상마당, 피카디리극장 등 독립 영화관을 전전하며 다양한 예술 영화들을 접했다. 흔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영화 같은 이야기’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쓰지만, 그보다는 누군가의 일상을 다룬 영화에 더욱 마음이 갔다. 영화를 통해 들여다본 타인의 내면에 나를 투영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고, 나름의 감상을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남다른 영화 취향을 뽐내곤 했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감성적인 영화 마니아로써 포지셔닝하며 이성에게 어필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다. 그만큼 영화란 나의 시각에서는 꽤나 근사하고 분위기 있는 취미였다.

 하지만 요즘은 영화 한 편에 오롯이 정신을 쏟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시 유튜브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유튜브(특히 숏츠)는 콘텐츠에 중독될 수 있는 최상의 구조로 디자인된 플랫폼인 것 같다. 일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에 어쩜 그리 재미난 요소가 가득한지… 심지어 그런 영상들이 하루 종일 봐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샘솟는다. 아마 죽는 날까지 유튜브만 보고 있어도 모든 콘텐츠를 다 소비할 수 없을 것이다. 집중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필요 없이 그저 보고만 있어도 과다한 도파민을 분출해 내는 유튜브에 중독되자, 긴 영상이나 활자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요즘은 독립 영화 상영관들도 많이 사라졌거니와, 눈길 가는 개봉작이 없는 탓에 넷플릭스를 통해 주로 예전 영화들을 감상한다. 언젠간 꼭 보려고 미뤄뒀던 명작들을 보는 것에는 큰 결심이 따른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검색 한 번에 영화를 볼 수 있는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두 시간 남짓한 영화를 쉬지 않고 보는 것이란 이제 더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 아무리 대단한 명작이라 하더라도 첫 5분이 지루하면 금세 스마튼 폰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중간중간 일시정지 해가며 감상하다 보면, 드라마를 보듯이 며칠에 거쳐 영화 한 편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사이 주인공에 투영할 수 있는 감정선의 연결은 끊기기 마련이고, 왓챠피디아에 내가 본 영화 개수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이다.

 이 마저도 왓챠피디아에서 나의 예상 평점이 높은 작품에 한해서이다. 예상 평점이 낮거나,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첫 5분에 날 사로잡지 못하면 이번생엔 그 작품의 결말을 영영 알지 못한다. 우연히 알게 된 보물 같은 나만의 영화를 찾기가 어려워진 셈이다.


3. 획일화된 여행.

  20대에 내가 가장 잘한 일을 뽑으라면 제대 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여행이 그 당시의 나만 할 수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휴대폰 로밍도 하지 않은 채 종이 지도에만 의지해 여행을 했다. 큼지막한 목적지만 있을 뿐 그 과정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 덕에 낯선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도 하였다. 또한 여행책이나 블로그에서는 소개해 주지 않는 이름 모를 골목 모퉁이에 오아시스처럼 발견한 현지 맛집 또한 내 여행을 특별하게 해 주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

 이제는 20대 때보다 돈은 좀 더 많지만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30대가 되었다. 낯선 골목에서 감상에 젖어 하염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짧은 시간 실패 없이 콤팩트한 여행을 하기 위해선 위험 요소를 줄여야 한다. 과거 내 여행이 탐험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철저한 관광에 그 초점이 맞춰질 뿐이다. sns에서 유명 인플루언서가 보증한 장소와 식당만 찾다 보니 여행의 퀄리티는 훨씬 높아졌다. 하지만 이전 여행에서처럼 사막 속 오아시스를 찾는 경험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sns에서 미리 보고 온 딱 그 정도의 여행만이 기다리고 있으며, 같은 여행지를 다녀온 다른 사람들과 획일화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2010년대의 종말과 30대의 시작은 내가 낭만이라 일컫던 많은 것들과의 작별로부터 출발했다. 갈수록 세상은 쾌락을 얻기 위한 과정을 건너뛰고 손쉬운 쾌락에만 몰두한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는 사라졌다. 물가의 상승이 임금의 성장을 추월한 것은 오래전 일이며, 사람들은 투자의 이름을 띈 투기에 열 올리며 투자의 등락에 미친 듯 도파민을 분비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조차 귀찮기만 한지, 데이팅 앱을 통해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을 손쉽게 만나 원하는 목적에 도달한다. 마치 ott 서비스에서 흥미 있는 콘텐츠를 서칭 하듯 말이다.

 궁금한 분야가 생겼을 때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여러 참고문헌을 파헤치다 마침내 그 해답을 얻었을 때의 쾌감은 이제 우매한 행동이 되었다. 검색 한 번에 원하는 정보가 간결하게 쏟아져 나오지만, 우리는 그 출처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 정보를 맹신한다.

 과정이 생략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린 노력 없이 도파민을 얻는다. 이 내성 강한 도파민은 현상 유지는커녕  더 센 자극을 가져오라고 아우성이다. 치열한 사유가 더는 필요해지지 않은 사회에서 누군가의 치열한 고민이 공유된다면, 그 사람은 진지충이 되고, 그 고민은 어딘가에 박제되어 그 사람의 흑역사가 된다. 도파민의 중독과 과정의 생략과 낭만의 상실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확신해 왔던 존엄마저도 옅어지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태는 언젠가 인간 스스로의 깊은 자성을 통해 이전 세대로 회귀될 것인지, 아니면 미래에는 새로운 환경에 맞게 진화된 신인류가 탄생할 것인지는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겠지만, 지금과는 다른 과거 또한 살아 본 입장에서 서글픔이 밀려오는 것만은 극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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