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일까?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것 같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이렇게 하면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을 하거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결정을 못하기도 한다. 결정을 하고 나서는 그 결정이 잘못되었을까봐 잠못 이루며 걱정을 한다.
그런 착한 성격도 나이를 먹으면 변하는 것 같다. 굳이 남에게 착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하거나 결정을 내려버리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잘못했을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까지는 아직 잃지 않았다는 거다. 이렇게 나이를 먹으면 감정도 변하고, 삶을 추구하는 방식도 변하고 가치있게 여기던 것들도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젊은 날엔 건강에 대해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하며 아무 거나 먹었고, 소화도 잘 시켰다. 그러다 보니 몸 이곳 저곳이 고장이 나 버려서 약을 먹어야 그나마 멀쩡하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약 아니면 뜨거운 여름 한 낮의 호박잎처럼 축 쳐저 있기가 일쑤다. 건강이 중요해지는 나이가 된 거다. 옛날엔 나의 성취가 중요했으나 이제는 건강이 중요하게 된거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도 변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변하지 않는 게 있으니 그것은 '질투'라는 감정이다.
나는 육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부모님의 사랑이 고플만큼 고팠다. 물론 그 사랑이 나만 고팠던 것은 아니었다. 언니들도, 오빠도, 동생들도 고팠을 것이다. 지금 나는 아들과 딸 둘의 엄만데 두 명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도 엄마의 사랑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가를 늘 관찰하고, 노심초사하고, 불평하고, 고마워하고, 감시한다. 그러니 육남매들은 어땠으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몸이 약했다. 내 바로 위 언니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하니, 나에 대한 걱정도 심했으리라. 몸이 약해서 그런지, 날 때 고생해서 그런지, 엄마는 내가 태어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육남매 중 유일하게 나만 기억이 나지 않으신단다. 다행이도 아빠를 무척 많이 닮은 나의 얼굴을 보면 데려다 키운 것 같지는 않다. 여튼 나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심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나는 이용했다. 좀더 많이 아팠고, 자주 아프다고 했으며, 조금 아파도 잠들기 전까지, 아니 엄마가 내 옆에 와서 내 이마를 짚어보기 전까지 신음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그 행동으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했다.
겉으로는 동생들이나 언니, 혹은 오빠를 더 인정하고 이뻐해도 받아들이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부모님의 눈에 들고 마음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착함'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이 사랑받고 싶고 더 많이 인정받고 싶어서 눈을 반짝이며 부모임이 원하는대로 삶을 살아왔으리라. 이건 아마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랑을 받고 싶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감정을 나는 '질투'라고 부른다.
그는 나에게 결혼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결혼하자는 말을 남자가 꼭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먼저 말해 주기를 바랬던 것 같다. 그에겐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이 있다고 했다. 형이 먼저 결혼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결혼할 수 없단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결혼하자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서 내가 먼저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밤 늦도록 만나야 하며, 늦게 귀가한다고 아빠에게 혼나야 하는지 기약할 수 없었다. 그 당시 그의 형에게는 만나는 사람도 딱히 없었기에 형의 결혼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내가 처음 만난 남자는 아니었다. 29년을 살아오면서 어찌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일 수 있으랴? 나는 남자들을 꽤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 많은 남자들과 모두 헤어졌다. 그 남자들 중에는 내가 좋아한 사람도 있었고, 나를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그 많은 어쩌면 많지 않을 수도 있는 남자들 중에 내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의 순수한 사랑에 내 마음이 '결혼해야겠다'는 쪽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결혼을 하고 난 후 그는 바로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그 때까지 학사 였던 나는 공부를 계속하는 남편이 부러웠다. 첫 아이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나도 대학원에 입학했다. 입학 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둘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아이를 키우며, 둘째를 임신한 채로, 직장을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때쯤 남편은 박사 논문을 쓴다고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 돈을 버는 사람은 가족 중에 나 뿐이었다. 힘들고 긴긴 날들이었다. 둘째를 낳고 나서 처음으로 석사 논문을 썼다. 대학 때 쓴 논문은 논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었기에 석사 논문을 쓸 능력도 기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해야하는 판에도 석사논문을 멈출 수 없고, 논문 없이 졸업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더욱 힘이 들었다. 왜 그런 힘든 길을 택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결혼을 하고 첫 애를 낳고나서 대학원에 입학을 한 동기 또한 '질투'라는 감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나는 나의 신랑을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 이면에 그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계속 공부를 하는 데 나만 이렇게 도태될 수는 없다. 뭐 이런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신랑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형(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3개월 만에 바로 결혼하심)과 함께 일본을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나는 그 때 아이들도 어리고, 내가 우리 아이들을 돌보면 되니까 잘 다녀 오시라고 말하며 딱히 어떤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여행 계획을 짜고, 여행 짐을 싸는 걸 보다보니 살살 또 '질투'의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왜 못 가지? 나는 어째서 여기 남아 애를 돌봐야 자? 이건 정말 억울한데?' 이런 생각들이 나를 뒤척이게 했다. 그래서 그가 일본 여행을 간 기간과 똑같은 기간에 친정 엄마(아빠는 절대 해외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설득하다 지쳐서 어쩔 수 없이 제외)를 모시고 여동생과 함게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혹시나 시부모님과 남편을 만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일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그럭저럭 세월은 지나갔다. 나의 '질투'의 감정은 별 자극없이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8월 31일 드디어 우리 신랑이 시집을 출간했다. 그가 25년 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니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서 시집을 출간한 거다. 그동안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하고, 존경하고, 탓하고, 독려한 세월이 정말 길다. 그리고 첫 시집을 출간한 나의 시인님께 정말 고생했다고, 너무 애썼다고, 당신의 시집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이 세상 그 어디에서 만난 작가도 당신처럼 위대하진 않다고, 않았다고,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고 실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그의 옆에서 어줍잖은 시를 썼다. 찬 바람이 불어 신춘문예의 계절이 오면 그는 시를 더욱 열심히 썼고, 나도 그에게 뒤질세라 뭐라도 썼다. 그러다 어느 월간지 동시부문 신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 뒤로 원고를 투고하거나 하지도 못한 채 그럭저럭 그를 만난 지 20년 가까이 되니 나도 또한 어느 정도 분량의 글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그의 시집을 받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시집에 사인을 받아서 직장 동료들에게 선물할 때 정말 마음이 설렜다. '드디어 우리 신랑이 시집을 내서, 나도 자랑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외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외치고 다녔다.
그런데 그 마음과는 또 다른 '질투'가 내마음 한 구석에서 자라옴을, 소리치고 있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었다. '너도 책을 내, 너도 할 수 있어, 너의 저력을 보여 줘.' 이런 속삭임이 나를 잠못들게 했다. 몇 년을 신춘문예에 낙방하고, 몇 번이나 공모전에 떨어지며 깨달은 점은 신춘문예는 '하늘의 별따기'(그러므로 따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고 공모전 수상작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가능할 것 같은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다. 브런치 작가도 한방에 딱! 합격하지 못하고 재수를 했다. 물론 떨어지면 붙을 때까지 도전할 생각이었다. 다행이 브런치에서는 그런 나의 오기를 알아본 모양으로 작가가 되는 걸 허락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어 브런치 중독에 빠져서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나는 '질투'에 불타오른다. 나도 나의 시집을 출간하고 싶은 의욕이 불타오른다. 그 책이 출간되는 날 나는 또 다시 브런치에 나의 소감을 남길 것이다. 기다리라 나의 첫 책이여. 나는 곧 너를 만나게 될지니. 너도 나를 만나서 우리 서로 부둥켜 안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자꾸나.
**질투는 나의힘은 기형도 시인의 시제목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