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cobalt Nov 21. 2023

지금 이 시대에, 삼 남매

삼 남매를 낳기까지 남편과 수많은 갈등이 있었다.

아들 딸 잘 낳고 사이좋은 남매로 예쁘게 키웠건만 하나를 더 낳자는 남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남편과 대화를 할 때면 어느새 "하나만 더 낳자"로 귀결되었고 나는 "나의 임무를 이미 다했다"라고  대화를 종결했다. 


남편의 공세가 이어질 때마다, 나는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왜 아이를 "더" 낳아야 하는 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남편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둘이서 노는 것보다 셋이면 더 재미있다. 더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둘이 만나서 둘을 낳은 4인 가족의 평범함에서 벗어나자.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답을 늘어놨다. 마치 국가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하는 공약과 정책들이 헛웃음을 유발하는 것처럼, 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반대로, 왜 우리가 더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지를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로 반박했다. 


이제 아이 둘 어린이집 보내고 내 일과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맞다. 

요즘시대 아이 하나당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냐. 우리 가정 경제를 생각해라. 

혼자서 아이 둘은 케어가능 하지만 셋은 무리다. 

거의 모든 것들이 "4인 가족"위주로 세팅되어 있다. 

나보고 카니발을 몰고 다니라는 거냐.


나의 반박은 끊임없이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셋째를 낳은 것은 남편의 아이들이 북적이는 가정에 대한 오랜 소망을 알고 있었고 남편과 끝없이 이어지는 말장난을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체념 때문이었다. 


그렇게 셋째 딸이 태어나고 남편이 꿈꾸던 바가 이뤄졌을 때, 나는 우울로 잠식돼 버렸다. 

왠지 나의 유용가치가 끝이 나버린 느낌, 아주 조금이나마 찰랑대던 생명력 같은 것이 셋째 아이와 함께 다 빠져나가 버린 느낌, 이제 다시 사회로 돌아갈 일이 더없이 아득해진 것도 한 몫했다. 


꽃처럼 예쁘게 태어난 아기가 나를 찾아 우는데, 가위에 눌린 건처럼 늪에 빠져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잠식했다. 나의 상태는 생각보다 처참해서, 첫째 둘째에게 고집했던 "삼 년은 엄마가"라는 공식은 깨지고 이런 엄마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이모님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는 이모님의 도움을 받았고 그동안 나는 일단 살기 위한 노력을 했다. 


스웨덴에서는 자발적으로 셋을 낳고 싶어 해서 "왜 많은 가정이 셋을 낳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셋을 낳는데 갖춰진 인프라는 엄마 아빠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탄력 근무제의 영향이 크다. 누구도 퇴직하지 않고도, 세 시면 퇴근이 가능한 나라에서 아이 셋은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부에서 출산율 증가를 위해 "필리핀 이모"를 합법으로 고용하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것을 보고 "아, 이 나라는 일을 덜 시키게 할 마음은 전혀 없구나"를 느끼게 한다. 일의 양을 줄여줄 생각은 없고 필리핀 이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은 더 열심히 하라는 말 아닌가. 물론 매일같이 커리어와 양육 사이에서 종종거리는 맞벌이 가정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정책의 방향이라는 것이, 일과 가정의 양립에 더 초점이 맞춰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들이 반짝이는 순간, 그리고 우리 가족이 행복한 순간을 더 풍요롭게 누리기 위한 발판이 만들어지는 것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싶다. 


나도 산후우울증을 극복하고 세 아이를 본다. 그리고 남편의 말이 맞았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둘이 싸우면, 둘이 사이가 안 좋으면 곧바로 단절되지만 셋이면 중재를 한다. 뭘 해도 게임이 되고 더 재미있다. 아이마다 갖고 있는 색이 달라서, 그 고유한 색이 우리 가족을 더 다채롭게 행복을 칠한다. 


그리고 셋쯤 되면, 서로 가진 성향과 강점이 다른 것이 보여서 그 아이의 고유함을 존중하고 품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을 보는 시선이 넉넉해진 다고나 할까. 

왜 많은 조건이 갖춰진 스웨덴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셋을 택하는지 이해가 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행복에는 큰 대가가 필요하다. 초등 아이가 하교하는 두시쯤에 맞춰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9시에서 1시까지의 시간을 의미 있게 써 보고자 자원봉사를 넣어도 떨어지는 현실이다. 사회에서 떨어져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사회에서 온 마음과 정신을 투자해서 일하는 사람들 주위에 어쭙잖게 얼쩡거리지 않는 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맞다. 자녀양육이 일 순위인 아줌마가 온 열과 성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 틈에 껴 있게 된다 해도, 물만 흐릴 뿐이다. 


이 모든 현실을 경험도 안 해보고 미리 파악해서 출산을 안 하는 여성들이 정말이지 나와는 다르게 현명하다. 그 현명한 여성들도 가정이 주는 행복에, 아이들이 주는 반짝이는 생명력에 가슴 벅차게 느꼈으면 좋겠다. 그 현명한 여성들이 수긍할 만한 조건이 갖춰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전에는? 나도 글쎄다. 





작가의 이전글 내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기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