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진_01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을까요?"
<누워 있는 누드>, 93x61cm, 캔버스에 유채, 1917,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아몬드 같은 눈과 가늘고 긴 목이 특징인 독특한 초상화법을 구축했던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하 모디*)와 그의 영원한 사랑이자 예술의 영감이 되었던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 1898-1920, 이하 잔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모디는 비참하고 불운하게 살다가 사후에 인정받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자주 언급되며 그가 죽고 나서 자살한 아내도 비극적인 연인으로 자주 언급되지요. 모디와 잔은 비록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사는 동안 열렬히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께 살면서 주로 잔을 모델로 많은 대표작을 그렸어요. 독창적이고 관능적인 여성 누드화를 주로 그렸던 모디는 살아생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답니다. 모디는 주변 예술가들이 명성을 얻는 동안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를 양육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후 모디는 사랑을 담은 작품을 그리는 데 시간을 쏟았고,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이 가장 유명한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모디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저주받은 화가'라는 뜻이랍니다)
모디는 이탈리아 리브른느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선천적인 폐렴으로 허약하게 자랐지요. 아버지가 광산 사업가로 큰 번영을 누려 어릴 적 모디의 삶은 꽤 부유했어요. 그러나 사업이 망하게 되자 집안이 가난해지면서 온갖 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14년경 모디는 약했던 폐가 더 악화되면서 조각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 후 파리 몽마르트르에 정착해 회화에만 집중하게 되죠. 주변에 아는 사람이나 창녀들을 모델로 주로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는데요. 특히 아프리카의 원시 조각상에 영향을 받은 그는 긴 목의 애수와 관능적인 여인상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는 잘 생긴 외모에 교양과 매너가 있어서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빵을 사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에 의지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예술가였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며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그는 술과 마약으로 겨우 버티는 신세가 되었고 당연히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917년 모디는 전속 화상이던 친구 즈보로프스키의 집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19세의 미술학도인 잔을 만나게 되는데요. 잔은 몽파르나스에 위치한 아카데미 콜라로시의 학생이었고, 모디의 동료인 일본 화가 후지타 츠쿠하루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는데 모디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듭니다. 이들의 사랑은 곧 깊어졌지만 보수적인 상류 가톨릭 집안이었던 잔의 부모님은 그와의 결합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잔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모디의 불안한 자의식을 함께 공유하며 기꺼이 그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폐결핵을 앓던 모디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로 이들은 니스의 해변으로 요양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지요. 1918년 3월 모디와 잔은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에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둘은 부부로서 살았지만 잔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합법적인 예식을 치르지 못합니다. 14살 연상에 알콜중독에 마약 복용, 결핵으로 몸까지 성하지 않은 가난한 무명 화가에게 딸을 보내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겠죠. 하지만 잔과 함께하는 동안 모디는 술도 줄였고, 마약도 끊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뿜어냈습니다. 작품은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 모디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잔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어요. 둘은 가난했지만 기쁨이 충만한 날들을 보냈고 모디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그려냅니다. 이듬해 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니스로 거처를 옮겼고, 1918년 11월 29일 그곳에서 잔은 첫딸을 낳았습니다. 이 시기에 모디는 얼마나 행복했던지 아기들과 소년, 소녀들을 주로 그렸어요. 니스는 모디와 잔의 딸 잔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목이 긴 여인으로 유명한 잔의 초상화들을 다수 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100x65cm, 캔버스에 유채, 1918-1919
모디는 폴 기욤이 주최한 『젊은 작가전』에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모디의 작품은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있었어요. 같은 해 12월 그는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 건 두 장의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바로 철거되고 전시회도 일찍 문을 닫고 말았죠. 모디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예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했습니다. 가난했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는 폐결핵이 더 심해졌어요. 그 와중에도 잔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죠. 이때 잔이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1919년 7월 7일, 그들은 증인을 앞에 두고 결혼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도 땔감이 없어 난로를 피울 수 없게 되자 잔은 친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모디는 잔이 그리워질 때면 잔의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커다란 집 밖에서 아무리 잔을 불러본들 안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어요. 잔의 부모가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통제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면 모디는 문 앞에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1920년 1월 건강이 악화된 그는 여러 날 바깥출입을 못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화가 사라테와 함께 문을 따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엔 거의 초주검이 된 모디가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마침내 그는 1920년 1월 22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파리 자선병원에 입원했고 1월 24일 35세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잔은 장례식에서 그야말로 울다 미칠 정도로 슬퍼했어요. 잔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그린 유작 <자살>에 나오는 그림 속에 칼로 자살하는 여인이 그녀 자신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자살할까 봐 오빠 앙드레가 곁에서 지켜봤지만 앙드레가 잠을 자던 1월 26일 새벽, 잠을 깬 잔은 뱃속에 든 둘째 아이와 함께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만 20세 나이로 남편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의 연인이며 아내였던 잔은 그 이튿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녀의 뱃속에는 8개월 된 아기가 있었습니다. 잔은 자신의 재능도 삶도 모두 포기한 채 사랑하는 연인인 모디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잔이 남긴 마지막 말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 모델이 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모디의 장례식은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장엄하게 치러졌고, 1월 27일 모디의 시체는 영원히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3년 후 그의 무덤이 문을 열고 잔의 시체를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디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어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 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는 잔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잔 에뷔테른. 1898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이들은 가난 속에서 살다가 죽었지만, 죽은 후에 유명해진 모디와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남은 잔의 이야기는 어떤 비극보다도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54x37.5cm, 캔버스에 유채, 1918
모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가늘고 긴 얼굴과 사슴처럼 길고 가녀린 목, 아몬드 형태의 눈 모양입니다. 어떤 인물화들은 눈동자 없이 텅 빈 눈으로 묘사된 작품들도 있는데요. 모디가 그린 인물은 마치 조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조각가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었죠. 그는 아프리카 가면처럼 생긴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서 그만의 특유한 초상화풍이 생겼다고 합니다. 모디가 그린 수많은 여인 초상화 중 대표작은 아무래도 잔을 그린 작품입니다. 주로 세로가 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캔버스의 중심부에 위치한 얼굴과 목, 손으로 이어지는 세로 선에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곡선미가 돋보여서 전체적으로 율동감을 줍니다. 초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체를 ‘길고 우아한 곡선’ 형태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모디가 잔의 머리에 검은 모자를 그린 것은 평소 그녀의 소박한 모습과 우아한 자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디는 잔을 그릴 때 눈동자를 마저 그리지 않고 작품을 마무리했는데요. 잔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나 허구가 아닌,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려면 오감이 작동하는데 겉으로 봤을 땐 눈이 가장 먼저 의식하는 것 같지만, 이미 무의식으로 결정되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1909년 모디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ş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되어 1914년까지 30여 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작업 중에 발생하는 먼지로 인해 이미 결핵으로 약화된 폐가 더 손상되자 조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모디는 1915년 시인 겸 화상인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Leopold Zborowski)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귀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모딜리아니는 본래부터 아방가르드 운동에 초연한 입장을 보인 고립을 자초한 화단의 거물로 그의 작품은 향후 어떤 화파의 발생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두산백과 참조)
참고 문헌:
1.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 컬처북스 편집부(지은이), 고양아람미술관, 2007
2.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도리스 크리스토프(지은이), 양영란(옮긴이), 마로니에북스, 2005
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장소현, 열화당, 2000 등이 있습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와 잔의 이야기를 적어 보았습니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들이 진실되고 깊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도 늘 함께하길.”_이랑
현재 앤솔로진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