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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Dec 16. 2020

13. 맥주와 노가리

부장님과 독대를 즐기던 신입 처자




지인에게 갑작스러운 나의 투병 사실을 알리는 건 생각보다 그지 같다.

그지 같은 포인트가 뭐냐 하면 ㅋㅋ 투병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은근슬쩍 관종끼가 튀어나와서 자꾸 드라마틱하게 대서사를 짜서 청중의 감동을 극대화하려는 내 모습이다. 부끄럽지만, '영업했음 잘했을 주둥이 소유자'임을 인정한다. (관종이라 이 곳에 글을 쓰고 있지만ㅋㅋ)


하루는 뜨문뜨문 연락을 주고받는 언니가 연락이 왔다. 낮술을 하자는 이유에서다. 육아 중이라 낮술만 짧게ㅋ 가능하다는 이 언니께 투병 스토리를 미처 들려드리지 못했기에 당시 나를 백수로만 알고 있었다.

짧게 그녀를 소개하자면, 전 직장의 부장님이자 현재는 인생 동료 겸 술친구다. 화통한 말투와 박력 넘치는 캐릭터로 '한 문장 이상' 말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기본적으로 통화도 5분 컷이다. 주로 Face to Face를 추구하신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낮술 제안을 스리슬쩍 패스했다. 갑자기 뭐에 꽂히셨는지 2차 제안이 금세 왔다. 난감해하며 2차 제안도 돌려 돌려 거절하자마자 돌직구가 날아왔다. "네 이냔! 임신을 한 게냐? 아님 뭔 일이 있음 말을 해! 거절 이유나 알자!" 으르렁.



'경이로운 소문' 드라마 속 엄혜란 씨와 싱크로율 100%인 부장님. 실제 외모도 몹시 닮음.



호랑이 기세에 눌려 깨깽. "부장님, 제게 10분을 주시면 썰 풀겠습니다. 가능합니까?"라고 묻자, 약 3초간의 침묵이 있었고 수화기 너머 둘째의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잠깐만, 둘째 놈 재우고 콜 한다" 뚜뚜-






기승전결을 촘촘히 구성하여 10분 안에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이 고객님은 신파를 꺼리며 담백한 팩트 나열을 선호한다. 늘어지는 스토리엔 가차 없이 "그래서 뭐?? 어찌 된겨??"를 날리시는 분이다. 부장님 니즈에 부합하는 스토리 라인을 구상하다 보니 다시 직장에 돌아온 기분까지 들었다.  


본인 이야기에 심취해 주둥이 털며 청중의 눈물을 자아내던 어제에 머물러 있을 순 없다. 최선을 다해 떠들 준비를 했고 호랭이 부장님의 콜과 함께 우두두두 썰을 풀었다. 평소에도 나의 일방적 나불거림을 팔짱 끼고 지켜보며 "잘 까부네"라고 딱 한마디 하시는 분이라 역시나 조용히 들어만 주셨다.   


부장님께 보고를 마치니 8분 컷!

다 듣고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셔서 덩달아 조용히 있자 그녀가 입을 떼고 내게 질문을 하셨다.

(*욕쟁이 할매 스타일이라 평소에도 '년'을 잘 붙임. '요년이~이냔이~'가 애칭임)


네냔이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거지?
그것도 6인실에?

흠.. 그나저나 너 멘털 괜찮냐??






예상도 못한 질문이 날아왔고, 엉뚱한 듯 정확히 짚은 포인트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다운 위로법이자, 알아차림이었다. 


"네년이 보통 예민하고 섬세 떠냐? 타고나길 남들보다 오감에 육감까지 발달하셔서 귀찮은 꼬라지 혼자 다 껴안고 가는 화상인데, 6인실에서 뭔 X고생이냐? 니년은 술 한잔 하면서 무디게 해 줘야 되는 팔자잖냐, 그걸 못해 어째?!"라고 툭 던지셨고, 뚝배기 깨는 화법은 여전했다ㅎㅎ.


뜻밖의 위로에 미간이 쭈굴쭈굴 해지면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6인실이라 너무너무 피곤해요ㅠㅠ 소머즈 귀와 매의 눈, 개코 탐지기로써 병원 생활하려니 죽겠어요!! 오만가지 다 신경 쓰이고, 감정이 널뛰는데, 안 그런 척하며 일반 환자 코스프레하고 살려니 더 죽갔어요!!"라고 징징거렸고 "안 봐도 알아 뻔하지 이년아~ㅋㅋ"라고 응수하셨다.


빨리 낫으라는 협박을 듣고 통화를 끝내니 이상스럽게도 속이 뻥 뚫린 듯 후련해졌다. 마치 회사 앞 호프집에 앉아 생맥 마시며 노가리 앞에 두고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술냄새 진동하는 추억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대부분 나 혼자 원맨쇼를 했고, 부장님은 피드백 없이 조용히 들어주셨다. 억울하거나 속상한 얘기 털어놓을 땐 '내 천자川' 미간, 웃긴 얘기 들으실 땐 '으하하하' 시원하게 웃고 땡.

오잉?? 그러고 보니 부장님이 오늘 첨으로 길게 말씀하셨네??  






병원 와서는 술 생각이 일절 없었는데, 이 날 만큼은 시원한 생맥을 벌컥벌컥 마시고 마요네즈 푹 찍은 노가리를 뜯고 싶어 졌다. 퇴원하고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앞에 앉은 이들의 사는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웃어줄 테다 그리고 세상 맛나게 술을 마시리라. 멋대가리 없이 혼자만 떠들어대던 지난날은 묻고, 정성껏 소통해서 나도 내 사람들 제대로 알아차려 줘야지. 물론 지갑도 더 자주 열리라! 기다려요 나의 술친구님들아~ ㅋㅋ 그동안 잘 들어줘 고마웠어 :) 


 

이런 술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못하는구나. 코로나 XX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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