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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Oct 08. 2020

7. 확률 95%의 의미

100에 가까워 진다? 100은 아니다?  


혈액 질환 진료로는 서울 성모 병원이 유명하다고 추천을 받았지만 아산 병원을 택했다 (물론 아산도 혈액암 진료로 국내 1위). 집과 가까워서도 있지만 (중요!), Plan B는 있어야지 싶었다.


아산 병원에서 초진 접수를 하면서 새삼 대기업의 시스템과 규모에 놀랐다. 강동구 시골쥐는 병원 안내서를 꼬깃꼬깃 손에 쥔 채 이리저리 치이다 진이 빠졌다. 숨 고르며 벤치에 앉아 있는데, 자녀분께 수속 절차가 복잡하고 힘들다 훌쩍이며 호소하는 어르신의 통화도 들었다. 심지어 타 지역에서 올라오신 어르신들은 큰 캐리어와 이불을 싸들고 대기 의자에 주무시며 기다린다. 대형 병원 투어는 이래저래 만만치 않다. 체력전이다.


수 백번도 더 거닌 아산 병원 산책로


혈액 검사 결과와 함께 담당 교수님의 초진 시간. 심장이 터져 나갈 듯 긴장되었지만 침착하게 증세/진료 이력을 설명드렸고, 교수님은 조용히 자료들을 검토하셨다. 희귀 난치병 '에반스 증후군'이라고 나와있는 진료 소견서를 차분히 읽어 내리시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입원이 시급하나 아산 병원엔 입원 대기가 한 달 반 정도 소요되니 교수님이 두 가지 제안을 하셨다.

   1. 아산 병원에서 주 3회 외래 진료를 보며 입원 대기하기

   2. 전(前) 병원 (강동 경희대병원)에 재입원해서 대기하기


혈액 내과는 장기 입원 환자들이 대부분이라 병실은 늘 부족하다고 한다. 흠... 그래두 어제 강동 경희대 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재입원? 놉!! 호기롭게 1번을 선택하고 입원 대기서를 작성하였다. 외래 진료가 만만치 않음을 이땐 몰랐다. 매번 층층으로 접수-대기-대기.. 그리고 클라쓰가 다른 진료비 ㄷㄷㄷ


초진 비용으로 60만 원이 나오고 약값만 몇만 원.. 주 3회 외래?? 몬해몬해~ 놀란 마음에 검색창에 "상급 병원 외래 진료비는 원래 높나요?"라고 몰래 검색을 해보기도ㅋㅋ 강동 경희대 병원에서 3주간 입원 비용이 토탈 230만 원 (본인 부담금 only) 정도 나왔는데, 아산 병원 떼끼!! 병원비 무서워 아프겄냐!!!  궁시렁 궁시렁.

  

아산 병원 내 전시회는 매주 바뀐다. 몇 번째 전시회였더라?? 허허허





두 번째 진료 날이었다.

집에서 내린 커피 향에 감탄하며 병원 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폰을 들여다보니 <부재중 9통>. 이른 아침부터? 누구지? 하는 찰나에 02-3xxx 로 시작하는 번호로 다시 걸려왔길래 냉큼 받았다.



어!! 받으셨다.
안녕하세요 아산 병원 교수 XXX입니다.
긴급한 상황이라 연락드립니다.
메모 가능하신 가요?



급하게 펜이랑 약봉투 뒷면을 준비했다.

"말씀하셔요, 교수님" 꿀꺽!

담당 교수님은 숨도 안 쉬며 차분히 와르르르 쏟아내셨다.

"혈액 검사 결과가 추가로 나왔습니다. 보호자와 함께 당장 응급실로 내원해야 합니다. 촌각을 다투니 최대한 서둘러 와 주셔야 하며, 응급실에 도착해서 'XXX 교수의 입원 승인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세요. 응급실에 자리가 나오는 대로 목에 중심정맥관이 삽입되는 카테터 시술이 진행될 것입니다. 삽입 후, 즉각 혈장 교환술이 시작됩니다. 자세한 설명은 응급실 오시면 추가로 해드리겠습니다. 하루빨리 혈장 교환술을 받지 않으면 신장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큽니다. 신장은 한번 손상되면 복구가 안됩니다. 빨리 오세요!!"


전화 상으로 워낙 교수님이 빠르게 설명하시기도 했지만, 의학 용어는 어려워서 메모를 하면서도 까막눈이었다. 그럼에도 설명 중에 정확히 귀에 꽂힌 단어가 "햄버거 병"이었다. 햄버거 병과 유사한 케이스라 하셨다. 네?? 뭐가 어찌 된 거지? 뜬금없이 뭐여..


통화가 끝나니 일시적으로 이명이 들리고 당이 떨어진다. 시간이 없다!! 퇴원할 때 꾸려온 캐리어를 고대로 다시 들고 아산 병원 응급실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목에 중심정맥관이 삽입되었다. 심장에 닿아있는 이 관으로 혈장 교환술이 진행될 예정이라 하셨다. 상황 파악하며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드디어 교수님의 전언을 듣게 되었다.


혈액 검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병명이 나오지 않았으나 확실한 건 "에반스 증후군"은 절대 아니다. 다른 희귀병으로 예상되는데 "햄버거 병 (용혈 요독 증후군 Hemolytic uremic syndrome, HUS)"과 비슷한 유형이다. 예상하는 병의 유일한 치료법이 혈장 교환술이다. 혈소판 수치를 정상으로 올릴 때까지 입원하여 매일 혈장 교환술이 진행된다. 병명은 대략 2~3주 후 확정되어 업데이트된다.


WHAT??

WHAT??


희귀 난치병 '에반스 증후군'은 아니라고?? 갑자기 경희대병원 교수님의 멘트가 스쳤다. 당시 "95% 확률로 에반스 증후군으로 사료된다"라고 하셨다(2편 참조). 그렇담.. 5%의 확률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엎었다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동시에 오기 마련인데 이건 어느 쪽이지? 머리가 지끈 아프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뒤죽박죽이다.


다른 희귀병이라 하셨지만, 불치 or 난치병 말고, 완치 가능한 희귀병도 있지 않을까.. 계속 희망을 찾게 된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응급실에 누워있는데 목에 삽입된 관에 주렁주렁 링거가 꽂혔다. 어.. 어랏? 아직 혈장 교환술이 뭔지도 잘 모르는데..  전개 속도가 어마 무시하다.

이 난리통에도 잠이 오네. 약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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