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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Feb 01. 2021

평범하지만 평균은 아닙니다.#11

우리는 인연이었을까?#3

결혼 날짜를 잡고 회사에 퇴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일본 출장이 잡혔다. 이렇게 된 거 출장 가서 술 한잔 하며 이야기해야겠다고 나름 계획을 짜고 출장길에 올랐다. 우리 거래처는 오사카에 있었는데 해마다 연말이면 2박 3일의 일정으로 몇몇 거래처를 돌며 인사하고 저녁 술자리를 통해 사이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퇴사 통보를 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과는 달리 면세점 쇼핑도 하고 룰루랄라 신나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180cm가 넘고 멀끔한 외모에 나보다는 두어 살 많아 보이는 남자. 잘생겨서 눈에 띈 건 절대 아니다. 분명 아는 얼굴이다. 어디서 봤더라??


대학 때 선배였다.


군대를 마치고 돌아온 선배들이 많았는데 다들 여자 후배들에게 들이대기 바쁘고 시답잖은 농담을 해서 하려야 반할 수 없는 남자들 틈에 그 선배가 있었다. 말이 없고 항상 뒷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수업을 듣고 조용히 사라지는 선배가 있었다. 한 간에 그 선배의 아버지가 목사님이라는 말도 있었다.(교회 오빠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선배와 나는 전공수업을 같이 듣기도 했지만 복학생으로는 둘만 영어회화 수업을 함께 들었다.

바로 그 선배였다. 얼굴이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인기가 있다거나 눈에 띄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선배였지만 나는 종종 친구들과 그 선배 이야기를 했다. 그 선배 이야기를 할 때는 CK라고 불렀다. 캘빈클라인 시계를 차고 있어서. 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고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하지 않았는데 그 시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수업시간 이외의 기억이 없다. 그 당시 유행하던 면바지에 폴로티셔츠가 아니라 항상 단정한 옷을 입었던 것 같다. 단정하지 않았데도 나는 그 선배가 단정한 모습이어서 너무도 단정해서 말을 못 걸어봤던 것 같다. 기억나는 것들이 하나같이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낮으려는 그런 찰나의 모습이다. 나와 선배를 어떻게라도 엮어보려고 기억을 죄다 뒤져봐도 수업시간에 내가 웃겨서 다들 웃음보가 터진 적이 있었는데 선배도 피식했던 것이 겨우 나와의 일화라면 일화이다.(이 정도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어째서인지 이 사람이 내 기억 속에 이렇게 선하게 남아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아주 잠깐 짝사랑 같은 걸 했었나 보다.) 이렇듯 모든 행동이 튀지 않고 정말 어쩌면 회색 같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사시사철 검정과 회색 같은 사람 그런데 그게 또 매력인 사람. 새로운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전혀 어럽지 않은 나도 같은 수업이 두 개나 되는데도 말을 걸어보진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명 그 선배다. 선배도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했구나. 출장을 가나? 분명 한국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와, 이거 뭐야. 결혼 날짜 잡았는데 막 이런 만남 뭐야… 어디 숨었다 이제 나타났어~’

뭔가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당장에 가서 말을 걸고 연락처를 주고받고 서울에서 한잔을 기울이고 또 뭐 그다음은 상상에 맡기겠지만?


2박 3일 동안 잘 먹고 잘 놀고 잘 지냈지만 퇴사 통보로 인하여 어색하고 머쓱한 분위기 속에 귀국길에 올랐다. 차장은 주말부부가 나쁘지는 않다며 슬퍼했지만 나는 돌아가는 길에 술이나 한 병 선물해 달라고 했다. 그때 산 술을 신혼 때 잘 마셨다.

마음은 가볍게 양손은 무겁게 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지막 출장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퇴사 통보까지 마치니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 귀국과 동시에 퇴사인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저런 아무 생각으로 마음이 핑크빛이 되어가고 있을 있을 때였다.

맞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것 맞다. 그 선배가 또 나타났다. 어디 삼류 연애 소설의 장면처럼 자꾸 우연을 가장해 자꾸 만난다. 자꾸 등장한다. 왜??


하늘이시여. 저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오랫동안 연애도 안 하다가 이제 겨우 결혼을 하려는데 왜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분명 이것은 시험이다. 평범한 인간이 드라마틱한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시험인 것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고 확대해석에 능한 사람이다. 매일 마시는 컵이 우리 집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조차 신기해하는 사람인데 이런 우연을 지나칠 수 없도록 누군가 설계해 놓은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졸업한 지 10년 된 얼굴만 스쳤던 선배가 같은 날 같은 비행기로 같은 곳에 출장 갔다가 같은 시간 같은 비행기로 귀국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난 또 왜 이 사람을 기억해내고야 만 것인가. 이건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게다가 저 준수한 외모를 보라고!!!


하마터면,

“저기, 혹시..”

할 뻔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잘 참았다. 나에게 우연한 만남은 확실한 사랑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을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팜므파탈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그 선배는 나를 기억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선배에 대한 기억이나 두근거림은 모두 나의 망상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망상은 망상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드라마처럼 엔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추접스럽고 어쩌면 불행한 뒷이야기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접으로 끝날뻔한 추억이 아직 간지러운 추억으로 남아 남편과 다툰 날 괜스레 그날 그 선배한테 말이나 걸어볼걸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마음껏 해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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