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운 Nov 20. 2024

27화. E9 비자 진료하는 허가 없어요.

“맞죠? 수염쟁이 한국 남자! 헐! 역시 맞았어.”     


나는 싱긋 웃어 주었다. 그러나 람야이가 잠시 쳐다보더니 얼굴이 험해졌다.     


“그런데 왜 자꾸 아니라고 했어요. 나 무시해서 그런 거죠? 태국 여자라서!!”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동남아 여자가 한국 남자 쫓아다니면 나쁜 소문난다면서요? 스캔들 된다면서요?”     


“아. 그, 그건...”     


“그리고 난 동바이 일 보고 한국 남자는 믿지 않기로 했어요. 한국 남자는 동남아 여자를 배신해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갑자기 ‘윙’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내 뒤쪽에 있던 산같이 쌓아둔 박스지 더미가 뒤로 물러 났다.      


‘앗! 뭐야!’ 람야이한테 고백하려던 참인데 갑자기 비밀 같았던 통로가 넓어지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람야이도 당황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지게차가 박스지 더미를 쌓아둔 팔레트를 옮기고 있었다. 다른 박스 지를 쌓으려고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윙! 윙!’ 시끄럽게 지게차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멈췄다.      


“두 분 거기서 뭐 하세요?”      


지게차 운전사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아농낫이었다.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람야이가 얼른 대답하더니 나가 버렸다. 나도 그냥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타이밍에 아농낫이라니! 운도 지지리 없다.    

 

람야이

석훈이 태국에서 만난 수염쟁이 한국 남자가 맞는데 지금까지 아니라고 부인을 하다니. 화가 났다.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였는데. 뭔가 말을 더 하려고 했는데 아농낫이 나타나는 바람에 듣지는 못했다. 하긴 기분이 나빠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분주히 물건을 뽁뽁이로 싸고 자동 포장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 화면이 드디어 오후 5시 59분이 6시로 변했다. 퇴근 시간이다. 재빨리 기계에서 나와 동바이 마랑과 함께 뛰다시피 라인을 벗어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작업대에서 사람들이 통로로 뛰다시피 나왔다. 포장장 나가는 출입구로 나가는 통로에는 개미처럼 많은 사람들이 가득 찬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뒤에서 석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뛰지 말고 걸어가세요. 넘어집니다!”     


아침 조회에서도 하고 맨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벌써 통로는 뛰다시피 움직이는 거대한 조류가 만들어져 천천히 걸어가기도 힘들다.     


보안 출입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나왔다. 바로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 복도 앞은 벌써 수십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퇴근 버스 자리를 맡기 위해서 서둘러 6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기숙사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들어가야 했다. 까닥하면 늦는다.     


3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수 십 명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줄 마지막에 가서 섰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1층. 2층... 우리는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사인판을 쳐다봤다.    

  

그런데 3층인 우리 층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휴우!’ 실망하는 한숨 소리가 우리 무리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อะไรเนี่ย! ที่หอพัก ตอนเย็นจะสายนะ! เดินขึ้นบันไดไปกันเถอะ! (뭐야! 기숙사 저녁 늦겠다! 그냥 계단으로 가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힘이 빠져 돌아 서서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구 계단 입구 쪽으로 몰려 가는데 그 사이에는 역방향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야간 출근하는 노동자들이다.    

 

사람들은 마치 줄을 서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천장이 높아 한 개 층이 기숙사 한 방 높이의 거의 2배이다. 비상구 계단으로 들어서 고개를 올리니 마치 바벨탑의 계단처럼 끝없이 하늘로 이어져 있다.     


제물을 바치러 하늘로 올라가는 제단처럼 시커멓고 가파르다. 다들 지쳐서 영혼이 빠진 얼굴로 빡빡하게 줄을 지어 좀비처럼 계단을 올라가는데 가끔 야간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 무리를 헤치며 반대로 내려왔다.      


한 개 층 정도 올라갔을까? 갑자기 위에서 ‘뭐야!’ 하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으악!’ ‘악!’하는 비명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일까?’하고 올려다보는 순간 사람들이 넘어져 도미노처럼 휩쓸려 오고 있었다. ‘으악!’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도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물결에 휩쓸려 몸이 넘어졌다. ‘으악!’ 그대로 계단 방향을 트는 평평한 공간까지 굴러 내려갔다. ‘악!’ 왼쪽 팔이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사방에서 ‘으악!’ ‘아앗!’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옆에서 동바이도 마랑도 한쪽에서 팔과 다리를 부여잡고 아프다고 소리 질렀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곧 입구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119를 불렀다. 석훈도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119가 나타나 한 명씩 들 것에 실어 날랐다. 내가 탄 앰뷸런스에 석훈이 올라탔다. 왼쪽 팔이 아파서 신음을 하자 석훈이 안타깝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요. 곧 병원 도착해요.”     


병원에 도착해 앰뷸런스에서 들것에 실려 내릴 때 보니 응급실 앞은 전쟁터 같았다. 앰뷸런스 십 여대가 들어와 들것에 실린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병원 사람들이 뛰어나와 아픈 사람들을 확인하고 들 것과 함께 응급실로 뛰었다.     


응급실 안 침대는 우리 회사에서 온 열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들 팔이나 다리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동바이는 왼쪽 다리가 아프다고 소리 질렀고 마랑은 오른쪽 팔이 아프다고 신음했다. 힐끗 보니 3분의 2는 한국인 노동자들이었고 5 명쯤이 나처럼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여기저기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니 응급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의사 둘이서 이리저리 침대를 옮겨가며 상태를 보고 지혈을 하거나 부목을 대고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보니 석훈은 이리저리 의사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의사는 여러 사람들을 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픈 걸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고통은 물밀 듯이 밀려왔다. 팔에는 힘이 다 빠져나갔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뼈가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옆에서는 동바이와 마랑이 각각 침대에서 마찬가지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오질 않았다. ‘아얏!’ 너무 아파하자 석훈이 달려왔다.     


“많이 아파요?”     


나를 보고 소리치더니 이리저리 둘러보며 의사를 불렀다.     


“의사 선생님! 여기도 봐주세요!”     


의사가 와서 나를 보더니 석훈에게 물었다.     

 

“이 환자 E9 비자죠?”     


“네? 맞아요. 외국인 노동자.”     


석훈이 대답했다. 

     

“우리 병원 E9 비자 진료하는 허가 없어요.”   

  

의사가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지 않는다니... 석훈의 얼굴이 빨개지며 화를 냈다.      


“뭐라고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외국인 노동자라고 다친 사람들 차별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분노하며 석훈이 소리쳤다. 그래도 의사가 못 들은 척 한국인 노동자를 보는데 석훈이 의사 앞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이러다 사람 죽으면 어떡하려고요? 그럼 저 인터넷에 올릴까요?”     


이렇게 목소리가 높은 사람이 아닌데. 아픈 와중에도 나는 생각했다. 옆에 있던 동바이도 마랑도 그리고 다른 외국인 동료도 고개를 돌려 봤다. 그걸 본 의사, 결심한 얼굴로 바뀌더니 나에게 다가와 다친 팔을 보기 시작했다.      


“일단 진통제 맞고 바로 엑스레이 찍은 후 조치할게요! 간호사! 여기 환자분 진통제 주사 주세요.” 

    

간호사가 놓아주는 진통제 주사를 맞으니 금방 통증이 가라앉았다.      


“안 아파요?”     


“네. 괜찮아요.”     


내가 대답을 하자 좀 안심이 된 얼굴로 다른 사람에게도 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들을 돌봤다. 의사에게도 뭐라 뭐라 얘기하며 요구도 하고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온 후 응급실로 다시 들어오니 주변이 다 조용해졌다. 다들 조치를 받은 후 고통이 가라앉았나 보다. 나도 조용히 누워 자려했는데 멀리서 지혜 이사가 남자 하나와 함께 들어오는 게 보였다. 

     

석훈     

“큰 일 났네! 큰 일 났어! 여기 다친 사원들 거의 석훈님이 관리했죠?”     


말하는 스티브의 표정은 걱정하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평소 버릇대로 코를 킁킁거리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기분 나쁜 건 조롱하는 말투이다. 게다가 남들 다 들으라고 큰 목소리였다. 응급실 비상구 문 너머 어두운 복도지만 문이 살짝 열려 있어 안에서 다 들릴 것이다.    

  

“뭐 관리자가 안전사고 관리를 못 해!”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얼굴이 굳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티브 옆에 있는 지혜도 안절부절이었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이렇게 사람들 많이 다치고. 석훈님이 책임지고 회사 그만두셔야죠.”     


스티브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밤이 깊고 응급실 안이 더 조용해져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지혜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마음이 벼랑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살짝 열려 있던 비상구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빛 사이로 누군가 들어왔다. 눈을 손으로 비비고 보니 람야이였다.      


“석훈 매니저님 잘못 없어요.”     


람야이가 스티브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링거를 빼고 아픈 얼굴로 다친 팔을 감싸고 나와 있었다. 스티브의 얼굴은 대번 험악해지더니 람야이를 유심히 봤다.     


“어! 감히 어디서 동남아 사원이! 뭐라고요?”     


“석훈님은 잘못 없다고요. 뛰지 말라고 말했어요.”

     

람야이가 스티브의 눈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하자 갑자기 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따뜻한 불이 가슴속에서 이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맞아요!”     


“맞다고요!”     


환한 빛 사이로 동바이와 마랑, 그리고 두 명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 있었다. 스티브와 지혜가 당황했다. 나는 갑자기 울컥했다.      


“이 새끼들 뭐야?”     


스티브는 난감한 얼굴이었고 지혜는 입을 다물었다.     

 

“석훈은 잘못 없어요. 매번 조심하라고 말했어요!”  

   

응급실에서 비껴드는 빛 속에서 람야이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