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혀하며 스티브가 떠나고 밤새 람야이 옆에서 그녀를 지켰다. 진통제를 맞았다지만 가끔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는 그녀를 보며 나도 마음이 아팠다. 처음부터 회사 엘리베이터 용량을 크게 만들었어야 하는데... 괜히 돈 아끼려다가 사람만 상했다.
새벽에 일반 병실로 옮겼다. 동바이와 마랑 등 람야이의 친구들과 외국인 노동자가 함께 6인실에 들게 되었다. 다들 다리나 팔에 골절상을 입거나 삔 부상을 입었다. 너무나 다행히 중상은 없었다. 람야이는 왼쪽 팔을 삐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본 후 오전에 깁스를 하기로 했다.
람야이의 침대에도 아침 빛이 스며들어 와 자고 있는 얼굴을 부드럽게 비춰 주었다. 지난밤, 나를 위해 아픈 팔을 참고 침대에서 걸어 변호를 해 주다니. 다시 생각해도 울컥했다. 아침빛이 스며드는 람야이의 갸름한 얼굴은 너무 예뻤다. 절로 손이 가 빰을 쓰다듬으려는데 람야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보며 웃었다.
얼른 손을 치우고 말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석훈이 맨날 나를 도와줬는데...”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에 나는 행복해졌다. 그때 문 쪽에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태국어로 ‘ตรงนี้หรอ? (여긴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아농낫과 2 명쯤의 태국 남자 동료들 그리고 여러 명의 다른 국적 외국인 노동자들이 시끄럽게 들이닥치며 소리쳤다. ‘람야이! 똥공주! 마랑! 수타!’
아농낫이 가장 앞에서 들어오며 람야이를 불렀다. 지금 겨우 안정되어 자고 있는데 이게 웬 소란인가! 10명이나 들어와 겨우 조용해진 병실을 헤집어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다들 동료들이 다친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워서 달려왔을 텐데. 아농낫이 이리저리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후 바로 람야이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손에는 음료수 박스를 들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각자의 친구를 찾아 침대로 달려갔다.
아농낫은 흘낏 나를 보고는 지나치더니 람야이 옆에 바싹 붙어 섰다. 바로 못 알아들을 태국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람야이! โอเคมั้ยครับ? (람야이! 괜찮아요?)”
람야이가 살짝 웃으며 태국어로 말했다.
“ไม่เป็นไรค่ะ. (괜찮아요.)”
아마 괜찮다고 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상반신을 일으키려다가 얼굴을 찡그리고 ‘아얏!’ 소리를 질렀다. 아픈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누워 있어요.”
내가 만류하며 아농낫을 한심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아농낫을 들은 척도 안 했다. 손에 든 음료수 병을 침대 옆 테이블에 놓더니 태국어로 말했다.
“อย่าหักโหมเกินไปค่ะ. ผมซื้อน้ำผลไม้ไทยที่ลำไยชอบมาครับ. ดื่มสักหน่อยค่ะ. (무리하지 말아요. 람야이가 좋아하는 태국 주스 사 왔어요. 좀 마셔요.) ”
아농낫이 음료수 박스에서 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따 람야이에게 건넸다. 외부에서 들여온 음식을 이렇게 막 먹어도 될까? 안 된다고 말릴 수도 없고 그냥 두고 봤다. 아농낫은 내게 비키라는 듯 힐끗힐끗 눈을 꼬아 나를 바라봤다.
결국 나는 뒤로 물러나 양쪽 6개 침대 사이 통로 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외국인 노동자들이 친구들의 침대로 가 시끄럽게 각자의 언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물론 아농낫은 람야이와 태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บาดเจ็บเยอะมั้ยครับ? (많이 다쳤어요?)”
람야이가 기어이 일어나 앉아 음료수 병을 입에서 떼며 대답했다.
“เข้าโรงพยาบาลแค่วันเดียวก็พอ ถ้าระวังสักอาทิตย์นึงก็จะหายแล้วค่ะ. (입원은 하루만 하면 되고 일주일 정도 조심하면 낫는대요.)”
“โล่งอกไปทีนะครับ. ได้ยินว่ามีอุบัติเหตุเกิดขึ้น ตกใจมากจริงๆค่ะ. กังวลมากกลัวว่าจะบาดเจ็บเยอะ. (정말 다행이에요. 사고 났다는 얘기 듣고 진짜 너무 놀랐어요. 많이 다쳤을까 봐 너무 걱정스러워서.)”
아농낫이 태국어로 길게 얘기했다. 그런데 아농낫이 손으로 람야이의 입 가를 닦는 게 아닌가? 람야이의 입 가에는 음료수 흐른 게 좀 묻어 있었다. 다행히 람야이가 얼굴에서 아농낫의 손을 떼며 뭐라고 말했다.
“ไม่ได้รับบาดเจ็บมากค่ะ.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아농낫의 손이 또 람야이의 얼굴 근처로 가려고 해서 끼어들었다.
“지금 안정해야 하니까 말은 많이 시키지 말고...”
그때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지혜였다.
“석훈 매니저님! 회사에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시는대요.”
회사? 잊고 있었다.
“문자 여러 번 보냈는데 확인 안 하신다고.”
지혜가 내 옆에 와 서며 재촉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밤새 확인도 안 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니 회사로 복귀하라는 문자가 10 통도 넘게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병현이 형 전화도 들어와 있었다.
“아. 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말하자 지혜가 재촉했다.
“빨리 회사 들어가 보세요. 여기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서둘러 병실을 나가다가 뒤돌아 보는데 아농낫은 여전히 람야이 옆에 서서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ฉันคุยกับแม่ชาวไทยแล้ว เลยขอให้ส่งยาที่ดีต่อการบาดเจ็บที่ขามาให้ค่ะ. คนไทยต้องกินยาแผนไทยถึงจะหายดีนะคะ. (내가 태국 엄마한테 얘기해서 다리 다친 데 좋다는 약 보내달라고 했어요. 태국 사람은 태국 약을 먹어야 낫지요.)”
“เฮ้อ ขนาดนั้นเลย. ขอบคุณครับ. (어휴 그렇게까지. 감사해요.)”
무슨 얘기를 태국어로 그렇게 길게 하는지... 아농낫은 다른 음료수 병을 또 따서 람야이에게 건네며 계속 태국어로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답답했다. 그러나 그대로 병실을 나올 수밖에 없다. 나가며 병현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세게 삔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했다. 병원에 간지 하루 만에 기브스를 하고 퇴원했다. 회사에서는 일주일간 병가를 줬는데 기숙사 방에서만 지내려니 너무너무너무 심심했다. 유튜브를 돌려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말이다. 여기저기 연락도 하고 보내다가 방콕 언니와도 통화를 했다.
그런데 대박! 내가 한국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얘기하자 언니는 방콕에 사는 태국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와서 한국을 잘 아는 남자라고 했다.
오늘이 그날이라 어젯밤부터 마사지 팩을 하고 잤더니 화장대 거울에 비친 얼굴에 광택이 난다. 다리 깁스 한 건 보이지 않고 얼굴만 핸드폰 화면 가득 보일 테니 화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갈고닦은 숙련된 한국식 기술로 화장을 했다.
뒤에서 람야이와 마랑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쳐다봤다. 단속을 했다.
“พี่เค้าใกล้จะมีนัดบอดทางวีดีโอคอลแล้ว ช่วยเงียบหน่อย! (이 언니가 곧 영상 통화로 소개팅을 하니까 좀 조용히 해줘!)”
“วิดีโอคอล นัดบอด? (영상 통화 소개팅?) 와! 대박!”
“ใช่แล้ว! ใช่แล้ว! (맞아! 맞아!)”
소파에 앉아 있던 람야이가 한국식 토속 표현으로 부러워하고 침대에 있던 마랑은 몸을 빼며 물었다.
“เล่นกับผู้ชายไทยหรอ? (태국 남자랑 해?)”
“เป็นอย่างนั้น (그럼!)”
“คิดได้ดีมากเลย. (잘 생각했어.)”
마랑이 어눌하게 맞장구쳐 주었다. 요즘 고향 오빠를 만난다더니 태국 남자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화장 고정 스프레이를 뿌리는데 드디어 전화가 왔다. 설레었다. 얼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마지막으로 화장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거울에 세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화면 안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태국 남자 얼굴이 떴다.
“สวัสดีครับ! คุณทงบาย! ยินดีที่ได้พบครับ. ผมกิตติศาสตร์ครับ. (안녕하세요! 동바이님! 반갑습니다. 저는 키티삿입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히 웃으니 남자의 얼굴이 더 잘 생겨 보였다.
“ที่กรุงเทพมีห้องพีซีแบบเกาหลีเหรอคะ? (방콕에서 한국식 피시방을 하신다고요?)”
“ครับ. ทำได้ดีมากครับ. อยากดูมั้ยครับ? (네. 굉장히 잘 돼요. 한번 보실래요?)”
남자가 핸드폰을 돌려 뒷배경을 보여주는데 10대가 넘는 PC들이 보였다. 게임용으로 유명한 의자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 차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전형적인 한국식 PC방 풍경이다. 퐁퐁 소리가 요란하고 제법 사람이 많은 잘 되는 모습이었다.
“เหมือนเกาหลีเลยนะครับ. (완전 한국 같네요.)”
“จนถึงเมื่อไม่นานมานี้ผมทำงานที่เกาหลีใช่มั้ยหละครับ. พอเห็นตอนนั้นก็ตัดสินใจว่า จะมาทำที่นี่ให้ได้ครับ. (제가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일했잖아요. 그때 보고 꼭 여기서 해보겠다고 결심했었어요.)”
다시 남자의 얼굴로 화면이 돌아왔다.
“ทำงานที่ไหนคะ? (어디서 일하셨어요?)”
“โรงงานนอกเมืองคยองกีโดครับ. จะกลับไปที่นั่นอีกครั้งในสัปดาห์หน้าค่ะ. (경기도 외곽 공장요. 다음 주에 거기 다시 돌아갈 거예요.)”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반가웠다.
“ผมได้ยินมาแบบนั้นครับ. ต่อสัญญากับบริษัทแล้วหรอครับ? (그렇다고 얘기 들었어요. 회사랑 계약 연장했어요?)”
“ครับ. HaHa! เจ้าของโรงงานบอกว่าจะต่อสัญญาให้ เพราะว่าชอบผมมากๆครับ. (네. 하하. 공장 사장님이 저를 너무 좋아하셔서 계약 연장해 주신다고 했어요.)”
“ประเทศไทยเข้าไปต่อวีซ่าหรอครับ? (태국은 비자 연장하려고 들어갔어요?)”
“ทำงานที่เกาหลีเลยรู้ดีสินะ. ครับ. (역시 한국에서 일해서 잘 아는구나. 네.)”
“เซ็นสัญญาจ้างแรงงานหรือยังคะ? (근로 계약서에 사인은 했어요?)”
순간 남자의 얼굴에 당황함이 떴다.
“ยัง... (아직...)”
그러나 남자는 금방 얼굴을 펴며 설명했다.
“เขาบอกว่าถ้าไปประเทศไทย เขาจะเซ็นสัญญาส่งมาให้. HaHa! เพราะว่าท่านประธานเป็นคนดีมากๆ. ไม่มีคนเกาหลีที่เหมือนกับท่านประธานของพวกเราค่ะ. ซื้อซัมกยอบซัลกับโซจูให้เยอะด้วย. (일단 태국 들어가 있으면 계약서에 사인해 보내신다고. 하하. 사장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서. 우리 사장님 같은 한국 사람 없어요. 삼겹살에 소주도 많이 사주시고.)”
남자가 웃는 바람에 나도 같이 웃어 주었다.
“อาทิตย์หน้าผมจะไปเกาหลี แล้วเจอกันที่โซลนะครับ. เพราะว่าที่นั่นอยู่ใกล้กัน. (다음 주에 제가 한국 가면 서울에서 만나요. 거기가 서로 가까우니까.)”
남자가 환히 웃으며 약속했다. 이런 약속이라면 대환영! 마음이 더 설렜다.
“ค่ะ. จะรอนะคะ. (네. 기다릴게요.)”
평소답지 않게 여자처럼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통화가 끊기자 람야이와 마랑이 팔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올린다.
“สุดยอดเลย! ผู้ชายหล่อมากเลย! (대박 사건! 남자가 너무 잘 생겼다!)”
“ใช่แล้ว! ใช่แล้ว! (맞아! 맞아!)”
람야이와 마랑이 난리가 났다. 내가 돌아보며 자신 있게 씩 웃어 주었다.
“พี่สาวคนนี้เป็นผู้หญิงแบบนี้! (이 언니가 이런 여자야!)”
방콕에서 저런 규모의 PC방을 한다면 투자도 많이 했을 거고 버는 돈도 많을 거다. 방콕에서는 뭐든 한국 문화가 대유행을 타고 있다. 더구나 다음 주에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가? 돈 많고 잘 생긴 방콕 남자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계단 사고 때 오른쪽 팔을 삐어서 기브스를 한지 벌써 5일이나 지나서 별로 아프진 않다. 그러나 밥 먹는 게 불편하고 세수할 때 불편하고 불편한 게 많다. 숫차이 오빠는 안 됐다고 밥을 사 주겠다고 센터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불편해서 안산 태국 식당에서 보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고급 태국 식당에 비하면 여긴 촌스런 태국식이라 내 마음이 편하다. 숫차이 오빠가 많이 먹으라며 이것저것 시켰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화려한 팟타이, 똠양꿍, 파낭 커를리를 보니 군침이 흐른다.
“กินนี่ด้วยสิ! (이것도 좀 먹고!)”
내 앞으로 파낭 커리를 밀어주는 오빠의 굵은 팔뚝은 용문신으로 울퉁불퉁하다. 하긴 말을 할 때마다 목에 그려진 용이 꿈틀거려서 좀 징그럽다. 그래도 오빠가 밀어 준 커리에 왼손으로 숟가락을 넣고 게살을 뜨는데 좀 흘렸다. 그러자 오빠가 얼른 숟가락을 잡더니 커리를 떠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이럴 수가! 나는 황홀해졌다. 음식이 꿀처럼 입 안에서 녹았다.
“พอได้ยินว่าบาดเจ็บผมก็กังวลมากเลย. (다쳤다는 말 듣고 내가 걱정 많이 했다.)”
“จริงหรอครับ? (정말요?)”
이렇게 숫차이 오빠가 나를 위해 주다니 너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