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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Nov 17. 2024

26화. 나 수염쟁이 한국 남자 맞아요.

지혜

“태국 사원들 야간 근무 많이 주세요.”     


다음 날 점심시간에 람야이는 아농낫과 함께 인사부로 찾아와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에게 주눅 들 만한 대, 람야이는 조심스럽게 얘기는 하지만 결코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게 나는 기분이 나빴다. 냉랭하게 말했다.       

“네? 태국 사원들한테만 특혜 줄 수 없어요.”    

 

“대신 태국 춤 공연 할게요.”     


람야이가 대답했다.

    

“우리 공연하기로 했습니다.”     


아농낫이 끼어들어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호락호락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나라 사원들보다 너무 잘해 주는 건데.”     


“다른 나라 사원들한테는 얘기 안 할게요.”     


잠시 망설였다.     


“그런 특혜 나 혼자 결정할 순 없어요.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드디어 석훈과 데이트를 했다. 비록 평일 점심이었지만 쉬는 날에도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석훈을 식당으로 끌어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회사 앞 초밥 집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초밥들이 꽃처럼 접시를 수놓았다.      


“I had seen Byunghun CEO at grandma’s home since I was a little baby. (어릴 때부터 명절 때마다 할머니 집에서 병현이 오빠를 만났어요.)”     


“그래서 이렇게 일찍 이사가 되셨구나!”     


석훈의 말이 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려 얼른 답해 주었다.     


“Nope. I graduated from US university in New York, major in corporate management. (아니에요. 저 미국에서 경영학 공부했었어요. 뉴욕에서.)”     


“아.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하. 그래서 미국 식으로 인사를 하시는구나.”     


‘미국 식으로?’ 좋은 뜻일까? 나쁜 뜻일까? 헷갈렸다.   

   

“태국 사원들 창립 기념일 공연은 하는데 야근 많이 달라고 하는데요.”     


“수당 많아서요?”     


“네. 무슨 외노자들은 다들 돈만 밝히고.”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나를 보는 석훈의 눈이 좀 흐려진 것 같다.      


“한국 사람들도 그래요.”     


내가 물끄러미 쳐다봤나 보다. 석훈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선선하게 대답했다.  

   

“그러세요.”


“네. 알겠습니다.”     


석훈이 접시에 있는 꽃 같은 초밥을 들어 깨작거렸다. 맛이 없나?     

 

“참! 이사님!”     


초밥을 젓가락으로 든 채 석훈이 물었다.    

 

“그거 누구 아이디어예요?”  

   

“뭐가요?”     


“야간 근무요.”     


누구긴. 람야이의 아이디어겠지. 그러나 그대로 얘기할 수는 없다.   

   

“아농낫 아이디어예요. 아농낫이 태국 유명 마트 채널 셋째 아들이더라고요.”  

   

내가 대답하자 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람야이     

혹시나 몰라 태국에서부터 태국 전통 의상을 가지고 온 건 천만다행이었다. 황금색 전통 여성복과 길고 높은 황금색 모자. 엄마가 뭔가 써먹을 데가 있다고 가방 안에 넣어준 거다. 다른 태국 친구들도 비슷한 이유로 태국 전통 의상을 가지고 왔다.      


일이 끝난 후 우리는 기숙사 공유 식당에 모여 공연을 준비했다. 태국 음악을 준비하고 유튜브로 춤을 보며 따라 하기로 했다. 나는 물론 잘한다. 파타야에 있을 때 시장에서 관광객 맞이용 시장 축제를 하면 알바로 곧잘 전통춤 공연에 나섰다. 내가 나서서 안무를 맞췄다.     

 

하지만 우리는 여자 셋, 남자 다섯 명이라 짝이 안 맞는다. 어쩔 수 없이 남자 둘을 짝으로 맞췄다. 수타가 여자로 나서 줘서 쏨싹과 짝을 맞췄다.      


“ทำไมฉันต้องทำกับเค้าด้วยอ่ะ? ขอสายคู่หน่อย! เป็นผู้หญิง! (왜 내가 얘랑 하냐? 짝 바꿔줘! 여자로!)”   

  

그러자 수타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ทำไมอ่ะ? ฉันก็แต่งหน้าสวยนะ. คนสวย! (왜? 나도 화장하면 이뻐. 미인이야!)”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당황하면서도 큭큭거리며 웃었다. 결국 우리는 수타에게 여성복을 입혔고 너무 예뻐서 큭큭거렸다.      


아농낫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짝이 되어 춤을 맞췄다. 하루를 통째로 일을 안 하고 연습했다. 그건 좋았다.     


강남 본사 얘기는 들었지만 서울의 중심가 강남 대로 옆에 있는 본사 건물은 높고 번쩍거렸다. 대형 물류 트럭들이 드나드는 거대하고 거친 물류 센터 건물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세련된 건물 벽으로 ‘서원 마켓’ 회사 로고가 반짝거렸다. 건물에 들어가면서부터 기가 죽으면서도 뭔가 뿌듯한 마음이었다.      


회사 안 대형 회의실도 극장식이었다. 너무 크지는 않지만 100명쯤 수용하는 크기로 앞쪽에 무대가 따로 있었다. 무대 위에는 ‘서원 마켓 창립 5주년’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 극장식 의자에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회사 CEO가 무대 위에서 기념사를 하는 동안 나와 태국 친구들은 무대 뒤편 대기실에서 공연 준비를 했다. 다들 태국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고 화려한 화장을 했다. 나도 오랜만에 눈화장을 짙게 하고 붉은색 립스틱을 발랐다. 아농낫을 연신 나를 힐끗힐끗 보고 웃으며 엄지 척을 해 주었다.     


‘5주년을 맞이하여 비약적인 성장을... 감사합니다’라고 회사 대표의 인사가 끝나갈 즈음 공연 연출자가 준비하라고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높고 긴 전통 모자를 쓰며 조금 긴장했다.  

    

무대 위에 올라 서 우리는 짝을 맞춰 춤 대형을 섰다. 태국 전통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관객석을 보자 석훈이 보였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시간에 웬일인가? 한참 물류 센터에서 일할 시간인데...     


여기는 회사의 높은 사람들만 오다고 했는데. 하찮은 매니저 주제에 여기를 오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석훈도 눈이 커져 여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에는 지혜가 앉아 있었다. 반짝이는 광택이 나는 얼굴과 화려한 정장 원피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연신 옆에 앉은 석훈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기를 보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뭔가 움찔 올라왔지만 다른 생각을 할 여유은 없었다.     


곧 태국 전통 음악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연습했던 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을 움직이고 팔을 올리고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고 또 짝인 아농낫과 손을 잡고 빙그르 돌았다. 돌면서 잠깐 보니 석훈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혜는 뭐라고 귓속말을 계속하는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편한 얼굴이었던 같다.     


나도 마음이 흐렸지만 화려한 화장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 아농낫의 손을 잡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았다. 돌 때마다 석훈을 보았다. 우리는 자꾸 눈이 부딪힌 것 같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석훈     


무대 위에서 람야이가 자꾸 아농낫의 손을 잡고 돈다. 태국 전통 춤을 춘다고 했지 남녀가 짝을 맞춰 춤을 춘다고는 하지 않은 것 아닌가. 이런 줄 알았으면 공연을 반대했을 거다.    

  

게다가 람야이는 왜 이렇게 이쁜가. 일할 때는 맨날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있어 잘 몰랐는데 화려한 화장을 하니 여배우 같다. 커다란 검고 깊은 눈, 발그레한 볼, 붉은 입술, 반짝이는 구릿빛 피부, 날씬한 허리. 작업복을 입었을 때도 이쁜데 태국 전통 의상을 입으니 더 아름답다.      


그런데 내 손이 아니라 아농낫의 손을 잡고 춤을 추다니. 아랫배에서 불같은 데 올라와 활활 타는 것 같다. 눈을 뗄 수가 없다.      


공연이 끝나고 기념식이 끝나자 병현이 형이 나를 불렀지만 내 몸은 저절로 무대 뒤 대기실로 향했다. 다행히 회사 임원들과 투자자들이 많아 다들 눈치채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무대는 부산하게 정리되고 있었고 나는 어수선한 틈을 타 무대 뒤로 슬며시 갔다. 대기실 앞에 이르자 문 사이로 람야이와 태국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하필 아농낫이 람야이의 모자를 벗어주며 휴지로 이마를 닦아 주고 있었다.      


‘ขอบคุณที่เหน็ดเหนื่อยครับ! (수고했어요!)’ 태국어로 말하며 다정하게 얼굴을 닦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람야이는 또 태국어로 ‘ขอบคุณ! (고마워요!)’ 하고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뱃속에서 올라오는 불이 이번엔 눈에서 이글거리며 타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석훈님!’하고 부르는 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큰 목소리여서 대기실 안 태국 노동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물론 람야이도 돌아보았다. 내가 머뭇하는 사이 지혜가 옆으로 와 팔짱을 끼었다.  

    

“We are going to have luncheon with US investor David, Alex, CEO and Audit Steve, soon. You should go with me. (오늘 미국 투자자 데이비드, 알렉스, 스티브 감사님이랑 대표님이랑 저녁 식사하기로 했어요. 상무님도 가셔야죠.)”     


지혜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끌고 가는 바람에 그냥 끌려가야 했다. 람야이가 눈이 커져서 보고 있었다.

      

지혜에게 끌려가 투자자들과 인사를 했다. 다들 식사하자고 나가는 틈에 나는 슬쩍 빠져나왔다. 람야이가 어떻게 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그대로 나갈 수 없었다. 지혜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 사이 그대로 돌아 공연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공연장은 사람들이 거의 다 나가고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급히 무대 뒤로 걸어가 대기실로 가 보았다. 대기실에도 사람들이 다들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람야이는 떠난 모양이다. 실망스러워 돌아서는데 대기실 구석에 길고 뾰족한 황금색 태국 전통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모자 끝에 작고 빨간 꽃장식이 달려 있는 게 람야이가 쓰던 것 같다.      


얼른 달려가서 집어 왔다. 투자자들과 식사하는 것도 거절하고 강남 집으로 돌아왔다. 한강 뷰가 내려다 보이는 넓고 넓은 집이지만 아무도 없어 휑하다. 가구가 많은 건 취향이 아니라 거실엔 소파와 테이블만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 황금색 모자를 올려놓았다. 람야이가 이 모자를 쓰고 환한 얼굴로 웃으며 빙그르 돌던 모습이 떠 올랐다. 모자를 들어 코에 대니 람야이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아차! 내가 변태야! 모자에서 코를 뗐다.     


“이게 뭐야? 왜 자꾸 생각해!”     


머리를 흔들다가 모자를 노려 봤다.   

  

“이건 또 왜 들고 왔냐고!!”     


모자에 주먹질을 한번 했다. ‘에잇!’ 모자가 푹 찌그러졌다.     

 

“훠이! 떨어져라!”     


찌그러진 모자에게다 다시 한번 주먹을 박아줬다. ‘퍽!’ 모자가 자꾸 찌그러진다. 내 머리에서 람야이 생각이 나가라고 자꾸 모자를 찌그러뜨렸다. 그러나 찌그러진 모자를 보고 나는 결심했다. 내일은 람야이에게 고백을 해야지!     


다음날 오후 마감을 치고 조금 한가해진 시간, 람야이를 불러 냈다. 사람 키 높이 이상으로 포장지 박스지 쌓아둔 더미더미 사이에는 작은 통로로. 거기서는 오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도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나 수염쟁이 한국 남자 맞아요. 3년 전 파타야 식당에서 만난.”     


‘헉!’ 소리치며 람야이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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