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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Nov 13. 2024

25화. 왜 자꾸 몸이 붙고 그래!!

그러나 바쁜 아침 시간이다. 다른 외국인 동료들처럼 작업대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석훈의 자리 뒤로 줄을 섰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와 석훈 앞에 섰다.

      

“여기 왜 왔어요?”     


내가 묻자 석훈이 못 들은 채 했다.

      

“5번 자리 가세요”     


헐! 아는 채도 안 하다니. 뒤에서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기도 해 얼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자리를 배정받은 후 브리핑 시간, 40여 명의 외국인 노동자 앞에 석훈이 섰다.      


“오늘부터 제가 담당입니다. 사고 나지 않게 조심하시면서 열심히 해 주세요. 일 시작하세요!”    

 

동바이, 마랑과 함께 작업대로 걸어가며 태국어로 속삭였다.      


“เกิดอะไรขึ้นกับซอกฮุนเนี่ย!! (석훈이 왠일이야!!)”     


“คนเหมือนงูมันตามติดสินะ. (뱀 같은 놈이 따라붙었네.)”  

   

동바이가 똥공주답게 말했다.      


“ใช่แล้ว! ใช่แล้ว! (맞아! 맞아!)”     


마랑이 맞장구치고 우리는 나란히 앞 뒤로 배치된 작업대로 들어갔다.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매니저 자리를 보자 석훈도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물론 얼른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늘도 작업대 옆으로는 집품장에서 올라온 집품 박스들이 3열로 대기하고 있었다. 박스 안에서 작은 과자 박스를 잡아 스캐너로 바코드를 스캔한 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메뉴에 ‘포장지 : B16’이 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박스 포장지를 쌓아 둔 선반 위를 살펴 B16 박스를 꺼냈는데 작업대 위 작은 과자 박스에 비하면 너무 컸다. 어제도 물건에 비해 포장지나 박스의 크기가 맞지 않는 게 너무 많았다. ‘왜 이렇게 안 맞아! 누가 만든 거야!’ 생각하며 다른 적당한 크기의 박스를 집어 포장한 후 운반 레일이 올렸다.      


집품 박스에서 다른 물건을 잡아 바코드를 스캔하니 이번엔 화면 안에 ‘포장지 : TM SP’라고 떠 있다. ‘이런 포장지는 본 적이 없는데...’ 화면을 보며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석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안 하고 뭐 합니까?”     


석훈이 옆에 와 있었다. 석훈을 보고 컴퓨터 화면 안 포장 메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뭐예요?”     


그런데 석훈이 대답을 못했다. 화면만 들여다보는데 자기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런 포장지 없어요”     


내가 말하자 석훈이 난감하게 말했다.      


“그냥 아무 포장지로 해요.”     


“정말 여기 관리자들은 답이 없어요. TM SP면 어느 거로 해야 하는지 가르쳐는 줘야지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석훈이 중얼거렸다.      


“답이 없기는... 오류가 발생하면 사원님이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개발하면 될 것 아니에요?”     


“솔루션이 뭐예요? TM SP가 솔루션이에요? 컴퓨터 추천 다 거짓말이던데. 제대로 물건 크기랑 맞는 걸 못한다고요. 컴퓨터가.”     


내가 또박또박 말하자 석훈이 갑자기 당황했다.     


“커 컴퓨터가요?”  

   

말까지 더듬었다.     

 

“네.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말하며 선반 위에 놓인 적당한 포장지를 잡는데 제법 큰 포장지가 기우뚱하더니 나란히 놓여 있던 포장 더미를 쳐 박스들이 한꺼번에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려고 했다. 그때 머리 위로 튼실한 팔 두 개가 올라오더니 떨어지는 포장 박스 뭉치를 두 손으로 잡았다. 석훈의 손이었다.      

 

헉. 놀랐다. 그런데 등 뒤가 따뜻했다. 석훈이 내 등 뒤에서 두 팔로 포장 박스 뭉치를 잡고 있는 거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석훈이 손을 놓으면 박스 뭉치가 우수수 떨어져 내릴 것 같아 우리는 잠시 그대로 있어야 했다.      


석훈의 숨결이 뒤통수로 불어오고 따뜻한 체온이 등 뒤에 느껴지고 향긋한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나는 그의 품에 쏙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흠칫 멈추어 서 있었다. 내 심장은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서도 쿵쾅쿵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변 움직임이 다 멈춘 것 같고 시간이 흐르는 게 또렷이 느껴졌다. 1초, 2초 3초...      


그러나 석진은 ‘으흠’ 하고 몸을 떼며 손에 잡은 포장지를 도로 선반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얼른 몸을 떼고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 나갔다. 나도 모른 척 적당한 포장지를 잡아 빼고 포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석훈      

매니저 자리로 돌아왔는데 얼굴이 빨개진 것 같다. 누가 볼까 고개를 숙이고 얼른 왔다. 괜히 데스크에 있는 노트북만 들여다봤다. 그런데 시스템은 안 보이고 람야이의 날렵한 뒷목, 부드러운 머리카락, 무슨 샴푸를 썼는지 싱그러운 냄새만 화면 위에 떠올랐다.     

 

‘왜 자꾸 몸이 붙고 그래!! 무슨 자석이야??’     


아니다! 일하는 중인데. 머리를 흔들었다.      


‘TM SP? Temporary Manufacutred Special Product? 도대체 무슨 말이야? 왜 그런 게 뜨는 거야?’    

 

어디서 나온 오류일까? 얼른 포장 알고리즘을 띄우고 찾아보기 시작했다. 포장지 추천이 안 맞다니 그것도 고쳐야겠다.      


지혜     

창 밖으로 시원한 한강뷰가 내려다 보이고 주변은 조용한데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 요리 위로 포크와 나이프만 달그락거리고 있다. 대표님이 오찬을 위해 비싼 식당을 통째로 예약해서 손님은 없고 식당 직원들만 부산스럽게 시중을 들고 있다. 이토록 고급지고 대우받는 식사가 만족스럽다.     


대표님이 석훈 상무님과 스티브 감사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이다. 그래서 자기 방에 박혀 잘 나오지 않는 석훈 상무님도 대표님의 지시라 식사 자리에 나오고 내 옆에 앉아 행복함이 배가 되었다. 대표님이 먼저 물으셨다.     


“일주일 후에 회사 창립 기념일인데 올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죠. 투자자들 모시고 행사 좀 제대로 했으면 하는데.”     


“무슨 밥 먹는 자리에서... 나중에 얘기해요. 형!”     


석훈이 얘기하자 스티브가 바로 발끈했다.     


“또 저 저... 형이라고... 공석과 사석을 구분 못하고...”    

 

스티브가 얼굴을 찌푸리자 석훈이 스티브를 노려 보고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전쟁을 벌이고 있어 그 사이에 낀 내가 정말 난감하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회사 창립 기념일에 태국 직원 공연을 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태국 전통 춤이 화려해서 보기가 좋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석훈이 힐끗 쳐다봤다.    

  

“좋지. 외국 애들은 그런 때 써먹는 거지.”   

  

스티브가 의자 등에 몸을 붙이고 나온 배를 앞으로 내밀며 거만하게 말하자 석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대표님은 바로 대답을 하셨다.     


“좋네요. 지혜 이사님이 알아서 하세요”  

   

대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티브가 손에 든 나이프를 휘저으며 석훈을 보고 껄렁거렸다.      


“그래 그렇게 큰소리 뻥뻥 치더니 스마트 시스템 디자인은 마무리 돼가고 있나~!!”     


“하고 있습니다.”     


석훈도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스티브의 입술이 한쪽으로 올라가며 대표님을 보고 말했다.      


“대표님, 글쎄 상무님이 지난주에도 천 건이나 마감을 못 지켰더라고요. 말단으로 손들고 내려가서 일을 하면 최소 기본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냥 일반 직원이었으면 진작에 잘렸어요. 안 그래요?”     


순간 석훈의 눈에서 불꽃이 튀며 나이프를 든 손을 꼭 쥐었다. 대표님은 석훈을 보며 가볍게 얘기했다. 

     

“천 건은 너무 했다. 배상하느라 비용 들었겠네.”   

  

“제대로 못 할 거 같으면 상무님이 회사를 그만두던가...”  

   

“아니 그건 상무님이 IT 일을 함께 하니까 그런 겁니다. 어제도 상무님 밤새 IT 작업하시고 눈이 충혈되셨어요.”     

 

제때 끼어든 것 같다. 석훈이 나를 보는 눈에 고마움이 넘친다. 나는 살짝 웃어줬다.   

   

석훈 편을 들어준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그가 나오면서 나를 잡았다.      


“회사 앞에 좋은 초밥집 있다고 했죠? 내일 점심 같이 먹을래요?”

     

“좋죠. 드디어 내가 상무님이랑 데이트 한번 해보나!!”     


마음이 환해지고 그와 나란히 걸어가는 내 실크 스커트 자락이 팔랑거렸다.   

   

다음날 근무 시간에 아농낫을 인사부로 불렀다.      


“인사 기록 보니까 부모님이 태국 유명 마트 체인 운영하시던데. 맞나요?”     


“아. 네.”   

  

이사실 소파에 마주 앉아 물어보자 아농낫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런 분이 한국에 오시고.”     


“한국 온라인 쇼핑 시스템을 익혀야 아버지 경영권을 물려받죠.” 

    

“음,,, 관리직으로 옮겨 드릴게요.”     


생각했던 대로 말을 건네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꾸벅하고 소파에서 일어나려는데 내가 말했다.  

   

“다음 주에 회사 창립 기념일이 있거든요. 그때 대주주들 모시고 기념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혹시 태국 직원들이 전통 춤 공연을 해 주실 순 없을까요? 공연 날이라든가 연습 하루 정도는 근무 대체해 드릴게요.” 

    

아농낫은 반갑게 대답했다. 


“네.”     


아농낫     

그날 밤, 기숙사 공유 식당에 태국 동료들을 모두 모았다. 람야이를 포함해 남자 넷, 여자 셋.    

  

“อีก 1 สัปดาห์เป็นวันครบรอบก่อตั้งบริษัท ตอนนั้นบริษัทขอให้พวกเราแสดงนาฏศิลป์พื้นเมืองของไทย. เค้าบอกว่าจะเลิกทำงานสองวันให้. (1주 후에 회사 창립 기념일인데 그때 회사에서 태국 전통춤 공연을 해 달라고 우리한테 요청이 왔어. 이틀 근무 빼주겠대.)”     


동료들이 웅성거렸다. ‘회사 창립 기념일?’ ‘공연???’ 그러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ไม่ทำ! พวกเราเป็นลิงในสวนสัตว์หรือไง? ทำงานดีกว่า. (안 해! 우리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야? 그냥 일할래.)”     


동바이가 똥공주답게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동료들도 동감했다. ‘ใช่แล้ว!! (맞아!!)’ ‘ทำไมพวกเราถึงดูไม่ได้!! (우리가 왜 구경거리가 되냐고!!)’      


이럴 줄 예상 못했다. 난감해졌다. 다만 뒤쪽에 있는 람야이는 아무 말없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ฉันเข้าใจที่คนไทยคัดค้านว่า ไม่สามารถเป็นสถานที่ท่องเที่ยวได้ค่ะ! (태국 사람들 구경 거리 될 수 없다고 반대하는 거 나는 이해가 돼요!)”     


람야이는 기숙사 공유 식당에서 나를 따로 불러내 말했다. 내가 실망스러워 돌아서려는데 람야이가 나를 잡았다.      


“เต้นหนึ่งวันดีกว่าถือกระสอบข้าวสารเป็นสิบๆกระสอบตลอดทั้งวันค่ะ. (하루 종일 10킬로 쌀포대 수십 개 드는 것보다 하루 춤추는 게 나아요.)”     


반가운 소리였다. 그녀는 야간 근무를 많이 달라고 요구하자고 내게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다. 태국 동료들은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지혜 이사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망설여졌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잘 하지만 내가 먼저 뭔가 말하는 건 언제나 자신이 없다.      


내가 망설이는 표정을 보이자 람야이가 지혜 이사에게 직접 가서 말해보겠다고 제안했다. 람야이는 진짜 보통 여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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