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한국인들이 참 좋아하는 독일 작가이다. 한때 ‘데미안’ 광풍이 일어났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헤세가 제시한 주체적인 신 아프락사스에 매료되었다. 10대와 20대 시기, 가족의 범주와 사회의 규범에 의문을 품고 한 번쯤 반항해 보고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자아를 세우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1919년 헤세는 ‘데미안’을 발표하고 얼마 후 1922년 ‘싯다르타’를 출간한다. ‘데미안’이 10대 소년의 성장기라면 ‘싯다르타’는 소년기에서 노년기까지의 깨달음을 그린다. 나는 ‘싯다르타’를 10대 때 한번 읽고 50대인 이번에 두 번째 읽었다. 10대 때 읽을 때는 독일 작가가 동양 철학인 불교를 어쩌면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하고 놀랐다. 물론 옴이라든가 일체의 합일성, 공, 같은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로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50대인 이제 다시 읽으니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을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소원으로부터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벗어나고,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멸각시키는 것, 자아로부터 벗어나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상태로 되는 것,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평점함을 얻는 것,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하는 가운데 경이로움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얼마나 고귀하고 높은 이상인가.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하여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충동과 욕망에 시달리는 범속한 인간들로부터 멀어지는 것. 10대 때에는 데미안에 나오는 사상에 매료되었다. 마치 아프락사스에 매료되는 것처럼. 그는 가장 현명한 자가 되고자 했으며 항상 최고의 열성파였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 있어서 학자이자 사상가이고 사제이자 현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노년에 이르게 되면 생각이 많이 변한다.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사람이 진정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마음을 세상에 열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옴’이라는 걸 경험한다. (요가할 때 가끔 나도 옴을 읊조렸다)
‘그는 생각과 통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그런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비록 그가 완성의 경지에 가까이 가 있었고, 최근 마음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러한 어린애 같은 인간들이 자기의 형제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은 이제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범속한 인간들 속에 죄인도 있지만 부처도 있는 걸 본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이 모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오랜 벗 고티마에게 말한다. 이제는 예수의 사랑에 맞닿게 되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이렇게 절묘하게 그려서 이 책은 참 신비로운 소설이다. 헤세의 아버지가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며 인도와 중국의 철학 및 정신세계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헤세가 결론으로 내린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범속한 말에 절대 공감한다.
싯다르타는 모든 존재는 신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존재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는 것이다. 이런 통찰은 물리학의 양자 역학 법칙을 떠올리게 한다. 양자 역학에서 미시적인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상태로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즉 입자는 여기에서 있고 저기에도 있지만 관찰자가 보는 순간 하나의 파동이 되어 모양을 이룬다는 얘기다. 상자에 담겨 있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 관찰자에게는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다.
존재는 하나로 규정할 수 없고 존재를 관찰하는 나 혹은 존재와 관계하는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상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훌륭한 소설이다.
*'봄날 책읽기' 한주 건너뛰었습니다. 독자님들! 좋은 봄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