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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Jan 06. 2024

4화. 걸그룹 옷차림의 필리핀인 알바

왜 알바 아줌마들은 처음 온 생짜인 나를 밀어 넣었을까? 왜 나한테 덤터기를 씌울까? 그런 생각조차 그 자리에서 하지 못하고 나는 손가락만 떨렸다.     


반장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반장은 일종의 ‘무른’ 사람 즉 쉬운 사람이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나는 포장 박스 안에 접착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스티커가 끈적거려 손가락에 착액이 묻기 때문에 빠르고 규칙적으로 붙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잘 해냈다.


(이미지 출처 : ShutterStock)

처음 10분간도 지연 없이 해내자 반장이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이후 별문제 없이 쭉쭉 스티커를 붙여 다른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어릴 때 오랫동안 배운 피아노로 손가락 근육이 발달한 거였든지 아니면 그날 굉장히 손가락 운이 좋았다. (앞으로 공장 알바의 운명을 밝혀주는 운이었다)   

  

반장은 너무 안심해 전화를 받으며 다른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오후 4시쯤 1차 포장 작업이 끝나고 10분간 쉬는 시간을 가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편한 의자에 앉는데 우연히 한눈에도 동남아 얼굴인 젊은 친구가 옆 자리에 앉았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걸그룹 레깅스 옷차림의 그녀는 콜라를 마시며 열심히 핸드폰으로 페이스북 메신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 ShutterStock)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그녀는 필리핀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 스물다섯이에요’라고 밝힌 그녀는 한국 남자랑 결혼해 2살 아기도 있단다.


필리핀에서 온 엄마가 지금 아기를 보고 있고 자신은 알바하러 나왔다고. 한국말을 꽤 잘했다. (사실 다른 공장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는데 그녀처럼 잘하는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잘해 준다며 BMW 자동차도 선물해 줬다고 말했다. 나는 입이 벌어졌다. 예쁘게 웃는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았다. 나는 섬세한 손가락 근육 기술로 빠르게 그날 분량의 포장을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만들어진 시디 패키지를 포장 박스 안에 몇 개씩 담는 작업을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패키지를 싼 얇은 비닐이 자꾸 찢어졌기 때문이다.


무른 반장은 직접 담는 작업을 했고 그 옆에서 비닐이 찢어졌는지 확인하는 검수를 하던 나는 조금씩 시간이 비었다.


포장 박스를 이동 박스에 담으면서도 반장에게는 계속 전화가 왔고 그 사이 나는 대신 그 작업을 조금씩 해 주었다. 6시 알람이 뜨자 알바들이 서서히 손을 멈추더니 반장의 눈치를 봤다.


알바들의 눈길을 한눈에 받는 무른 반장이 ‘수고하셨습니다! 퇴근하세요!’라고 소리치자마자 여사님들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창고를 뛰다시피 나갔다.  

   

그때까지도 반장의 일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나는 반장이 불쌍해 보여 조금 도와주며 지체되었다. 아침에 함께 차를 탔던 아줌마들이 나에게 눈치를 보냈고 반장은 얼른 가라고 얘기했다.   

   

공장을 나오는데 눈치를 주던 아줌마가 다가오더니 ‘처음 온 언니!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에요?’하고 화난 얼굴로 얘기했다. 나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런가 봐요! 다음부터는 천천히 해야겠다’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알바 아줌마 아니 언니들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인력 운반 차량으로 걸어가는데 언니들이 손에 든 차키를 누르자 주차되어 있는 20여 대의 차들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렸다. 빛나는 BMW에는 필리핀 언니가 타고 있었다.


앞에 세워 둔 외제차부터 시작해서 차들이 줄줄이 퇴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차장에 처박아 두고 가끔 끌고 다녔던 10 년 된 경차를 다시 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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