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김상무에게 알바 신청을 하며 그곳 앨범 공장에 가면 되냐고 하자 다른 앨범 포장 공장으로 가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혹시 주말에도 알바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때 깨달았다. 예쁜 언니가 직알바를 신청했다는 걸.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처음 일을 소개해 준 김상무에게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원래 앨범 공장에 안 보내냐고 묻자 김상무는 이젠 아무도 거기 안 보낼 거라고 말했다. 사태가 실에 구슬 꿰듯이 보였다. 거래를 끊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른 앨범 포장 공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또 다른 세계였다.
마찬가지로 아이돌 앨범을 포장하는 공장은 논밭 한가운데 있었고 커다란 창고가 2개 있었다. 예쁜 언니가 알려주던 전설의 회사였다. 그곳에만 가는 알바 언니들이 있고 왕언니들이 공정을 조직한다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한다고.
출근하자 마찬가지로 공장 앞 공터에는 20여 대의 자동차가 주차해 있고 그중 몇 대는 외제차였다.
9시 출근 10분 전이었는데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30여 명의 알바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고 그중 몇몇이 창고 안 컨베이어 벨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문으로 들어가자 맞은 사람은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언니(왕언니)였다. 여유 있어 보이는 옷차림에 작업용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여기 처음 왔어요?’ 묻더니 나를 좀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출근부를 내밀길래 이름을 적고 가방을 넣어두는 캐비닛을 알려 주었다.
가방을 캐비닛에 넣고 작업장으로 돌아가자 벌써 커다란 작업대 2개에는 알바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런데 알바들이 빼곡히 앉아 자리가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왕언니가 나를 보더니 의자를 찾아 가져와 앉으라고 했다. 나는 얼른 의자를 찾아 공장 안을 돌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겨우 구석에서 고장 난 학습용 의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의자를 끌고 가 왕언니가 있는 작업대에 빈틈을 찾아 앉았다.
의자가 기울어져 몸이 휘청하자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왕언니가 ‘좀 가르쳐줘!’ 말하자 왕언니 옆자리에 앉은 언니(시녀 언니)가 오더니 내게 포장지 접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돼요. 한번 해 봐요!’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익히기에는 조금 버거웠다. 나는 포장지를 접다 버벅거렸다. 그러자 시녀 언니가 바로 잔소리를 했다.
‘어머! 이 언니 너무 못한다! 이렇게 이렇게 하라니까. 이것도 못해요?’
마음을 졸이며 겨우 따라 했다. 그런데 10분도 되지 않아 왕언니가 보더니 말했다.
‘새로 온 언니 너무 못 한다. 안 되겠다. 가서 포장지나 날라요’
작업대 옆에는 시디 박스를 만드는 포장지가 팔레트(바퀴가 없는 평탄한 짐대)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남자 알바들이 나르고 있었다. 할 수 없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포장지를 날랐다.
그러나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어때서? 나는 앉아서 포장지만 접다가 뱃살 나오는 일보다 몸을 움직이며 근육을 움직이는 일이 더 좋았다.
오전 내내 포장지를 계속 날랐다. 허리와 다리가 아팠지만 돈 버는 사람의 숙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일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도록 눈치를 살폈다.
허리가 많이 아파질 무렵 갑자기 작업대 언니들이 일제히 일어서더니 구석에 있는 빈 작업대로 몰려 갔다.
일부는 작업대 위에 깨끗한 종이를 깔고 일부는 출입문에 있는 스티로폼 박스들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레트에 있는 포장지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맛있는 냄새를 맡고 점심시간임을 깨달았다.
점심 작업대로 가니 주변으로는 의자가 나란히 놓여 그 위에 핸드폰이나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뷔페식 점심을 늘어놓은 알바들은 식판에 음식들을 놓은 후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
스티로폼에 담긴 반찬들은 제육볶음 등 나름 풍성하고 맛나 보였다. 하지만 내가 점심 작업대로 갔을 때에는 모든 의자에 핸드폰,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자리가 없다’고 하자 왕언니가 의자를 찾아와 앉으라고 했다. 나는 급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의자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식을 깨는 현실 타격! 결국 나는 그대로 식사 작업대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뷔페식 반찬통에 남아 있는 반찬이 거의 없었다. 김치와 멸치만 조금 남아 있었다. 다른 알바들은 자리에 앉아 ‘제육볶음 맛있다’ ‘오늘 밥 잘 됐네’ 얘기하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식판에 밥과 김치만 놓고 서서 먹기 시작했다. 한마디 말 거는 사람 없이 다들 못 본 체 했다. 눈물이 났다.
* 올해 1월 3일 첫글을 올린 후 2주만에 누적 조회수 25만을 넘었습니다. 오늘 자로는 27만이 넘어갑니다. 다음 '직장인' 섹션에 첫글로 두 차례나 올랐습니다. 며칠간 핸드폰이 하루종일 알람으로 부들거린 신세계였습니다.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