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는 경상도 시골에 사신다. 5월 어버이날 전 안부전화를 드리며 어버이날 뭐 갖고 싶은 계 없느냐고 여쭸다. 용돈이라도 부쳐드릴까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시는 말씀.
‘아이고야! 돈은 필요 없다. 와서 고추 모종 좀 심어라!’
그럴 줄 알았다. 매년 시아버님은 꼭 어버이날 주간에 고추 모종을 밭에 심는다. 다른 선물은 다 필요 없다. 도시 사는 자식들이 와서 어버이날 선물로 고추 모종 밭일을 하길 원하신다.
그런데 비닐로 산 흙 위에 고추 모종을 심고는 아버님은 꼭 농약물을 뿌린다. 내가 5여 년을 말렸는데도 말이다.
‘풀 없애는 데는 이거 만한 게 없다. 농약 없이 우째 농사를 짓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유기농 채소를 사 먹는 사람이다. 고추 모종 심은 밭에 농약물을 뿌리는 걸 보면 소름이 돋는다.
남편은 4형제이다. 나는 4형제 막내의 며느리이고 경상도 시댁에서는 다소곳이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지만 이때만큼은 나서서 말린 지가 5년이 넘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시아주버님들도 말렸다. 그런데 절대 말을 안 들으셨다. 일종의 경상도 남자의 자존심이랄까!!
아버님은 70여 년을 농사를 지으신 분이다. 자기 방식이 확고한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0살이 되기 전부터 농사를 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래도 머리가 트여 사범 전문학교에 진학하시고 초등 교사 자격증을 땄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농사일에서 손을 놓지 않으셨다. 결혼을 일찍 하시고는 시어머니가 그 농사일을 하셨다. 그렇게 해서 네 형제를 키우고 다 대학을 졸업시켰다.
올해도 나는 고추 모종 심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주말 남편과 함께 시골에 갔다. 그런데 웬 일로 고추 밭일을 안 시키시고 복숭아나무 작은 열매 따기를 시키셨다. 남편에게 시키고 나한테는 집 앞 밭에 있는 부추를 뜯으란다. (위에 있는 사진이 부추밭이다)
집 앞 부추는 여리여리한 조선 부추에 딱 봐도 농약은 일도 치지 않았다. 저녁 햇살에 (비닐하우스에서 농약 뿌리고 키우는 짙은 녹색의 두꺼운 잎사위 부추가 아니라) 연두 빛의 부추가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웬일이냐! 농약을 안 치시고!’ 하며 신나게 부추를 뜯었다. 시아버지가 농약 싫어하는 며느리 생각해서 따로 부추를 관리하신 거다.
그리곤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냉장고 안에는 근처 도시에 사는 형님이 만들어 놓은 반찬들이 많이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한 것들이 많았다. 아버님이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한 거다. 시아버지는 혼자 사신다.
작년 가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70년을 함께 사시며 시어머니가 차려준 밥만 먹어서 시아버지는 밥도 제대로 못하신다. 심지어 챙겨놓은 반찬도 못 꺼내드신다. 큰 아주버님이 도시인 집에 와서 살라고 말하지만 본인은 여기를 떠나서 살 수 없다고 거절하신다.
시아버지에게 농사를 짓지 말라고 아들들이 강력하게 말리고 있다. 하지만 ‘내사 마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시며 쌀농사는 포기하셨지만 복숭아 농사와 고추 농사는 계속하신다 (저희 아버님 고추는 내다 팔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큰 아주버님이 자주 와서 돌봐주시고 멀리 사는 형제들이 돌아가며 아버님을 찾아뵙고 있다. 밥솥 안 밥이 말라 눌어붙어가는 걸 보니 마음이 애잔해졌다.
다음 날 아침, 고추밭에 갈 채비를 하는데 아버님이 전화 한 통을 받으신 후 빨리 장에 가자고 재촉하신다. 친구가 전화를 했단다. 장에서 만나 점심이랑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시아버님 마음이 급해지셨다. 오랜만에 막내아들 부부가 내려와 고추 모종 심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 마! 밭일은 됐다. 너네는 나 장에 데려다주고 빨리 서울 올라 가라이!’
하하! 남편과 나는 웃었다. 이제는 자식들보다 친구가 더 좋은 나이가 되신 모양이다. 자식들이야 한 달에 한번 내려올까 말까지만 가까이 사는 친구분은 연락만 하면 쉽게 만날 수 있으니 자식들보다 낫다.
아침을 먹으며 아버님이 친구분 자랑을 많이 하셨다. 집에 자동차가 4대 있고, 소 80 마리와 닭 100 마리를 키운단다. 아버님보다 8살 젊은 분이 엄청 부자에다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닌다고 자랑자랑하신다.
남편과 나는 서둘러 짐을 챙기고 성질이 급한 아버님을 모시고 읍내 장터로 가서 친구분에게 데려가 드렸다. 아버님은 친구 분에게 ‘우리 막내며느리 왔다!’고 소개도 시켜 주셨다. 그리고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시며 친구분의 자동차에 타더니 부웅 떠나셨다. 고추 모종 따위는 잊으셨다.
서울로 오기 위해 차로 오르면서 나는 아무래도 ‘친구 분한테 건강 보조 식품이라고 사다 드려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오래오래 사셔서 시아버님 친구하게. 농약 싫어하는 며느리 위해 농약 일도 안 친 부추밭을 가꾸신 시아버님이 건강하게 친구 분이랑 놀러 다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