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온앤오프
첫 아이가 6개월이 되자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맡기고 일터로 가는 내 몸과 마음이 처음 한 달은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나의 몸은 익숙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스스로 새삼 깨닫는다. 일터로 오니 평소 집중력이 있었던 나로 되돌아갔다.
근무 중 쉬는 시간 동안 아이와 간단한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그조차도 할 생각을 못 했다. 점심 후 여유 시간이 있어도 말이다. 사실 순간 잊어버리고 그 타이밍을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큰아이를 1년 넘게 돌봐줬던 언니는 그런 내게 무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퇴근만 하면 집에 가는 길 동안 빨리 가고 싶어 누구보다 더 서둘렀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에 가는 걸음이 그 누구보다 빨랐다.
나는 온앤오프가 잘 되었던 것 같다.
주말이나 저녁에 집에 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몇 번 가져온 적이 있었지만, 매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마음만 불편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만약 더 해야 할 급한 일이 있다면 아예 늦게까지 야근하는 것을 택했다.
육아에서도 투자 시간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했던 것 같다. 집에 오면 아이에 집중하고 일하지 않는 엄마처럼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래서 주말과 이어지는 회사 워크숍이나 행사를 그 누구보다 싫어했다.
간혹 아픈 아이를 두고 출근할 때가 있었는데, 사실 그때는 괜히 뭔가 큰 숙제를 못 한 사람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출근하고 한쪽이 계속 아려왔다. 점차 두 아이가 자라면서 그 마음도 숙련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믿고 맡기고 왔다면 아이와 그 사람을 믿자. 일터에서 걱정한다고 그 아이가 더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 너무 당연한 생각을 진짜 내 생각으로 가져오면서 설령 아이가 심하게 아프더라도 마음을 다잡고 일터에 오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둘째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다니며 논문을 쓸 때도 온앤오프하는 습관은 도움이 되었다. 대학원 공부는 자신만의 속도로 진도를 나가기 때문에, 특히 석사와 박사 논문을 제 순서에 쓰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그런 선배들 사례 때문에 육아를 핑계 삼아 내 진도를 연기할 수도 있었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대학원 학위 자체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학교와 가정에서의 온앤오프로 비교적 빨리 학위를 끝낼 수 있었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언제나 늘 아이를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의 에너지와 집중력은 한계가 있다. 일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아이를 비롯해 가정의 뭔가를 생각한다면 일의 진도가 더딜 수 있다. 이로 인해 자주 일을 집에 가져오게 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남은 일을 고민하거나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아이에게 집중하지 못할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일하고 있는 엄마에게 와서 같이 놀자고 보챌 수도 있고, 남편이나 다른 가족에게 잠시 아이를 맡겨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도움은 당연히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집에 있는데 아이와 함께하지 못해 더 조급해지고 아이에게 더 미안해지고, 심지어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남편과 다른 가족의 모습을 주시하면서 신경이 곤두설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스스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일상에 여유가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와 늘 피곤하고 성과에도 만족감이 떨어질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와 있었던 절대 시간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을 텐데, 엄마가 자신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나의 전략(?)이 통했던 게 아닐까.
어떤 사람과의 시간은 양보다 질에 의해 기억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