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쁜 날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메다 Feb 02. 2022

재미는 있는데 손이 안가

고등학생쯤이었을까, 적당히 머리가 큰 나는 학자의 삶을 꿈꿨다. 일어나자마자 연구실에 출근해 책과 논문 속에 파묻혀 살다가 이리저리 세미나를 돌아다니는 요즘 학자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던 학자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7시쯤 알람 없이 자연스레 눈을 뜨고 책상에 앉아 조간신문을 보며 직접 내린 우롱차를 마신다. 신문을 다 보면 가볍게 바깥에 나가 30분 정도 산책을 즐긴다. 하늘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태어났음에 감사하다가 아침으로 먹을 갓 구운 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해가 질 때까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지루하거나 힘들 때면 대자로 들어 누워서 음악을 즐긴다. 기별 없이 친구가 찾아오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맞이해 다과를 들며 함께 연구하는 분야나 일상,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해가 지면 또 펜을 잡되 이번에는 학문이 아니라 나를 위한 펜을 잡는다. 일기장에 잡다한 단상이나 오늘의 이야기를 쓰고 음미한다. 시와 고전을 필사하며 마음을 가꾸고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든다. 이게 내가 생각하던 학자의 삶이다.


대학에 들어오고 교수님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대충 확인하고 나서는 학자의 꿈은 접었다. 나는 그들처럼 진득하게 앉아서 한 가지 분야를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다. 또 학자의 삶이 유유자적하고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며 좁은 방에서 자신을 갈아 넣는 생활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내 꿈의 삶에서 학자라는 이름표는 뗐지만, 사실 아직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백수의 삶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지 나는 여전히 위 같은 삶을 꿈꾸며 산다.



대학 신입생 때 나는 풋볼매니저(FM)라는 게임에 빠졌다. 2018년 한 해동안 1806시간이나 게임을 했다. 2학년인 2019년에는 1435시간을 했다. 평균을 내면 한 해에 이 게임만 1620시간을 했다. 매일 8시간씩 잠을 잔다고 치면 1년 365일 중 깨어 잇는 시간은 5840시간이다. 나는 그 시간 중 1/3을 이 게임에 쏟았다. 학교에 가지 않은 시간은 늘 컴퓨터를 켜놓고 이 게임을 했었던 것 같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 가기도 싫어서 결석하고 FM을 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2018년과 2019년의 기억이 거의 없다. 혼자 하는 게임은 대개 추억조차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뒤지게 열심히 하기는 했다.

차츰 재미가 없어졌다. 게임은 여전히 계속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졌다. 게임 속 상황은 계속해서 변하지만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무슨 버튼을 누를까 가 다를 뿐이지 웬만한 상황은 머릿속에 다 들어가 패턴화 돼있었다. 혼자 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보니 사람과 할 때처럼 돌발변수도 없었다. 통제된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게임이 굴러가기 시작하자 흥미를 잃었다.



게임을 끄고 생각하면 내가 게임을 하며 만족스러워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사람과 겨루는 게임이든 혼자 하는 게임이든, 할 때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게임을 끄기만 하면 허무함이 몰려왔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게임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으나 가끔은 그런 날에도 허무함과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게임은 내게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취미라고 하더라도 취미에 위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임은 가장 낮은 등급의 취미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취미였던 글쓰기, 필사, 독서, 운동 등에 힘을 쏟기로 했다. 어렸을 때 추억에 취해 피아노도 샀다. 고등학생 때 시작했던 학자의 삶이 내게는 이상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삶과 그런 취미생활은 다른 삶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급한 취미인 게임을 버리고 새로운 루틴을 짜고자 마음먹었다. 매일 10분씩 시집을 읽으며 맘에 드는 시를 필사하는 스케줄을 집어넣었다.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서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고, 책장은 읽고 싶은 새 책들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새 취미를 갖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시간이나 힘이 남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여유로운 주말에도 새 취미는 내게 정착하지 않았다. 글쓰기나 책 읽기, 필사는 분명히 재밌는 취미였다. 하지만 도저히 시작이 안 됐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했더니 재미가 없어서 싫어하는 거라면 모를까, 정작 하면 재미있는데 도저히 손이 안 갔다. 내게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무척이나 큰 스트레스였고, 짜증과 자책은 나를 이 취미와 더 멀게 만들었다. 


취미는 내가 즐겁고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고통스러운 과제처럼 여겨졌다. 꾸준한 일상이라는 게 없는 비대면 화상강의 시즌의 대학생활과 비는 시간을 채워줄 취미의 부재로 인해 내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루를 채워 줄 시간이 없었고, 공부나 책을 읽지 않은 날은 '왜 할 일을 하지 않았니?' 하는 나의 힐난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게임을 한 날은 '왜 그런 저급한 취미를 좋아하니? 어차피 후회할 거면서'하고 스스로에게 화살을 날렸다. 상담을 다니기 시작한 이유가 이것은 아니었지만, 위 같은 사고 패턴은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상담과 병원을 열심히 다녔다. 생활이 나아짐과 함께 내 문제가 뭐였는지도 대강 알 수 있었다. 내 문제는 완벽하게 하려는 강박관념이었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정제된 한 편의 독서감상문을 써야 하고, 필사를 하면 그 시는 반드시 외워야 했다. 운동을 하면 최소 1시간 이상을 매일 꾸준히 해야 했고 글을 쓰면 세 번, 네 번의 퇴고를 거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글을 써야 했다. 물론 이런 행동이나 습관이 나쁜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해당 활동의 깊이를 더욱 더해주는 바람직한 일들이다. 다만 나는 그 '바람직한'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재밌어야 할 일을 과제로 만들고 거부감을 심었다는 게 문제다.


동기의 원천은 보상이다. 월급 같은 외적인 동기도 있고 흥미 같은 내적 동기도 있다. 뭐가 됐던 일을 하려면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취미에는 보상이 없었다. 일단 하면 재밌긴 하지만 그 후에 따라오는 스스로의 비난과 '해야 하는' 일들의 부담감을 이길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게 내 문제였고 여전히도 문제다. 여전히 게임도 하지 않고 다른 일도 하지 않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자책하는 날이 많다. 글쓰기는 무섭고 책 읽기는 막막하며 필사는 머리 아프다.


특히 글 쓰는 건 오늘 쓴 글에서도 내 문제가 잘 드러난다. 서론이 너무 길고 본격적이며, 글이 길어지다 보면 원래의 주제를 잃게 된다. 오늘 글의 제목도 처음은 '브런치 발행 버튼이 너무 무섭다'였다. 이런저런 부담과 강박관념,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에다가 정돈된 브런치의 시스템이 그런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쓰다 보니 분량이 너무 많아졌고 하려던 이야기와는 너무 멀어졌다. 내가 생각할 때 이 글은 낙제점이다. 구성과 체계가 아무것도 없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을 어떻게 수정하고 퇴고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써서 발행 버튼을 누른다. 이것저것 재면서 완벽을 추구하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졸작이라도 일단 시도를 하며 결과를 쌓아나가는 게 더 낫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는다면 새벽 세 시의 도로에서 죽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