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진화에 대해서
가을 산책이 좋은 요즘이다. 아주 작은 외투 하나 걸치면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기분은 물씬 느낄 수 있는 날씨, 유난히 맑은 듯한 까만 하늘과 아직은 푸르러서 더욱 예쁜 나무들 덕분이다.
저녁 식사 후, 여유로운 시간. 남편이 산책을 가자고 한다. 둘이 신나게 산책을 갈 준비를 하며 외투를 챙기는데 둘째가 다가온다.
“ 어디 갈 거야? 나도 갈 거야!”
쉬고 싶다는 첫째는 쉬고 우리 셋은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선다.
아직은 엄마, 아빠 손 잡고 걷고 싶은 막내둥이 둘째가 우리 둘의 손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 길이 좁아서 둘만 손을 잡아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삐진 듯 한 아이이지만 금세 내 손을 잡고 한참을 걷는다. 혼자 걸어야 할 정도로 좁은 길에서는 이제 쪼르르 먼저 걸어가고 있는 둘째의 모습이 발랄하다.
한참을 한 줄로 걷다가 보니 어느새 넓어진 길, 차도 옆이라 안심이 안되었는지 남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말없이 배려하는 남편의 모습에 다시 감동하며 그렇게 그렇게 걸어간다.
아이와 함께 온 길이라 산책로를 변경한다. 평소 내가 다니는 새벽 산책길을 안내하고 그곳을 돌아온다.
“여기가 내가 아침마다 산책하는 곳이야.”
“여기까지 다녀오니 엄마가 없구나. 나도 일찍 일어나는데 엄마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거야?”
이런 말 저런 말 건네며 다시 돌아오는 길. 문득 10년 전 이 길을 홀로 걸어가던 시절을 생각한다.
신혼 시절에도 이 근처에 살던 나는 퇴근하며 이 길을 혼자 걷곤 했다. 포장조차 덜된 아주 좁은 흙길이었던 곳이다. 이제는 보도블록이 잘 깔리고 가로등까지 설치된 어엿한 인도가 된 길.
흙길을 홀로 걷던 나는 10년 뒤에 넓어진 이 길을 사랑하는 이 둘과 특히, 새로운 생명체와 걷는 걸 상상하지 못했었지. 그저 홀로 생각에 잠겨 걸을 뿐이었다.
어느덧 생각도 할 말도 많아진 지구에서 가장 신비로운 생명체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이렇게 인류는 진화하고 있는 걸까?
묵묵히 아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남편을 본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바쁘셨던 아빠를 둔 덕에 아침 , 저녁을 아버지와 먹은 일이 별로 없다던 남편. 좋은 추억도 나쁜 추억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던 남편. 그가 산책길에 아이의 손을 살포시 잡고 걷는다. 여행길에는 아이의 겉옷을 챙기고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잡아주며 아이가 자전거를 배우도록 도와준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빠처럼, 다정한 말을 건네고 여기저기서 포옹해주는 그런 아빠는 아니지만 여전히 남편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안다.
아주 작은 그 한 걸음을 걷는 것, 어제의 내가 받은 유산보다 조금은 더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 인간이 수만 년간 걸어온 진화가 아닐까?
수만 년이라는 단어 안에 녹아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생각해본다. 아주 작은 그 한 걸음을 걷기 위해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새로워지겠노라는 다짐으로 자신을 이끌어 왔을까?
그 한 걸음의 은총이 면면히 이어져서 우리는 그렇게 점점 더 인간적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이제 더 넓은 길에 들어선 우리는 셋이 손을 꼭 잡고 걷는다. 몇십 년 후의 아이는 어떤 걸음을 걸을까? 궁금하다. 그 한 걸음을 걷는 순간, 아이는 꼭 마주 잡은 이 두 손과 걸음의 추억이 아이에게 힘을 보태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