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큰 딸의 사려 깊음을 재발견하는 날이었다.
시작은, 핸드폰이었다. 5학년이 된 후, 주변 친구들이 새 핸드폰을 바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수연이의 마음이 싱숭생숭했나 보다. 스마트폰이라기엔 공부 폰에 가까운(문자, 전화, 사진 찍기만 할 수 있음.) 핸드폰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는 늘 아쉬워한다. 새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는 대신, 그런 아쉬움을 핸드폰 케이스로 달래려 했나 보다.
“엄마 핸드폰 케이스 바꾸고 싶어요.”
아이의 투명 핸드폰 케이스는 핸드폰을 구입할 때, 받은 것으로 벌써 2년간이나 써왔다. 그것조차도 새로 바꾸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 해서, 자신이 핸드폰에 그려둔 캐릭터를 계속 지우려고 노력해봤나 보다.
“엄마,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덧 그리기도 하고, 아빠한테 선크림을 받아서 묻혀보기도 했는데 잘 안 지워져. 그거 지워지면 사달라고 안 할게.”
아, 무언가 새로워진 기분을 느끼고 싶었음에도 사달라고 투정 부리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한 아이의 시도가 너무 예뻤다. 무료로 받은 케이스조차 불평 없이 오래도록 잘 쓰고 핸드폰도 고장이나 깨짐 없이 잘 사용한 딸을 생각하니, 대견하고 고마웠다. 큰 아이의 조용한 조심성이 성격이기도 하겠지만 소중한 것들을 잘 지켜내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두 번째 일화는 동생을 향한 배려이다. 어제, 남편에게 차를 빌렸다. 접촉사고로 카센터에 맡겨진 내 차로는 외출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출근하는 남편의 차를 빌리는 대신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내가 데리러 가기로 했다. 남편은 밤 10시쯤 퇴근할 예정이었다. 늦은 밤에 딸 둘만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얼른 오겠다고 당부를 해두고 티브이를 보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자 아쉬워하는 큰 아이.
“엄마, 나 마인 크래프트 게임을 하고 싶은데.”
“밤늦은 시간이라 안 될 거 같은데, 내일 해!”
“알겠어.”
더 조르지 않고 참으면서 기다리려는 아이가 대견했다.
남편을 데리러 가는 길, 남편은 생각보다 퇴근 시간이 더 걸리겠다면서 문자를 보냈다. 비록 10분이겠지만 나는 더 기다릴 아이들이 안타까워서 기다리는 동안 게임을 해도 좋다고 큰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수연이가 하고 싶던 게임이 아닌, 로블록스라는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수연아, 마인 크래프트 게임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응, 정연이가 이거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동생이 하고 싶다는 게임으로 양보해서 함께 놀아준 큰 아이의 모습. 순간 울컥하고 밀려오던 감동. 언니의 배려는 부모님이 없을 때, 더욱 빛이 발했다.
이 중에 백미는 한밤중이었다. 평소에도 잠자리가 예민한 큰 딸. 부스럭거림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아이가 뒤척이고 있었다.
‘고양이 때문인가?’
그 곁에 자던 나도 살포시 잠에서 깼다. 그런데 아이는 내가 자는 중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살며시 내게 이불을 펴서 잘 덮어주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잘 자는 아이의 모습이 되어주었다.
내가 가끔 잠에서 깨나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아이도 이렇게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말없이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던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잘 커가는 아이의 모습이 고마웠다. 평소에 애정 표현이나 살가운 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 큰 아이의 모습이기에 더욱 마음에 감동이 일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배려로는 동생 정연이도 지고 싶지 않았나 보다.
오늘 낮에는 동생 정연이의 아름다운 배려를 보았다. 정연이랑 둘이 컵라면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다른 간식을 기웃거리던 중에 밀키스 1+1 세트를 사게 되었다.
“정연아! 하나는 정연이 꺼, 하나는 언니 꺼야.”
라고 일러두기만 했는데 정연이는 야무지게 두 음료수를 잘 챙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 음료수 사 왔어. 언니 꺼도 있어.”
라고 신나게 전해주는 둘째.
한 시간쯤 후, 딸들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나는 오랜만에 온 친구들이 편히 잘 놀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을 했다.
“냉동실에 아이스크림 있어, 냉장고에는 음료수도 있으니 편히 먹으렴! ”
이야기를 듣던 둘째가 내게 와서 귓속말로 이야기한다.
“그러면 언니가 싫어하잖아. 친구가 언니 꺼 먹으면 어떻게 해?”
“엄마가 미안해, 다른 친구들이 먹으면 엄마가 다시 사줄게.”
한참을 놀고 친구들이 돌아가고 난 뒤, 식탁 위의 음료수를 보았다. 반이 넘게 비워져 있던 음료수 병이 보였다.
‘꽤 많이 마셨구나. 이따 사러가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저녁 식사를 차렸다.
잠시 후, 음료수가 먹고 싶다고 찾아온 언니에게 동생이 말한다.
“언니, 언니 음료수는 냉장고에 있어.”
아, 비워진 음료수는 둘째의 것이었다. 언니가 음료수가 없으면 서운해할까 봐 자신의 음료수를 먼저 나눠준 것이다. 밀봉이 되어 새것인 음료수를 보며 둘째의 절제와 배려심에 새삼 놀랐다. 아직 어린 두 딸이 작은 행동으로 보여준 큰 배려심에 나도 모르게 깊은 감동을 받은 이틀이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친 순간들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 순간들을 살아낼 때에 나는 늘 나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나만 생각하고 싶은 그런 순간에도 타인을 위해 작은 배려, 그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을 대비하며 나는 오늘 기록의 냉장고를 연다. 작은 알사탕처럼 달콤하고 작은, 잊힐만한 이 아름다운 기억을 내 마음속 냉장고 곳곳에 숨기듯 넣어둔다.
추운 마음의 그날, 이렇게 작은 사탕 같은 배려가 필요한 그날, 이 기억의 사탕을 꺼내려한다. 이 달콤한 기억의 사탕으로 얼어있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아주 작은 배려의 사탕을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잊힐만한 이 작은 일화를 이 딸들의 사랑스러운 교훈을 글로 적어둔다. 그 사랑, 그 배려를 보관하는 기록이라는 냉장고를 가진 나의 일상은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