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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검 Jul 25. 2021

중국의 역대 수도

영토 확장과 외세 침략에 의해 동으로, 북으로.

 중국의 왕조


은주 춘추전국, 진한 위진남북, 수당 송원명청..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2+4 리듬으로 배웠던 중국 왕조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주입식 교육의 효과가 이러하다. 중국에서는 하나라를 최초의 국가로 여기나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은 하나라는 전설상의 왕조라고 설명한다. 은나라(상나라가 더 맞는 표현이다.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이어서 은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중국에서는 많은 왕조가 세워졌다.   



중국의 역대 수도


중국은 땅이 크다 보니 왕조도 여럿이다.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와 같이 통일왕조가 있었던 기간도 있고, 위/촉/오 삼국지와 같이 여러 나라가 공존했던 기간도 있다. 하나의 왕조라고 해서 수도가 한 곳이 아니라 황제의 마음에 따라 수도가 이리저리 바뀐 적도 있다. 당나라 수도를 보통 장안(지금의 시안)이라고 하지만 측천무후가 황제였던 시절(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가 황제였던 시절, 참고로 청나라 서태후는 자신을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에는 수도가 '잠시' 뤄양이었다.


인터넷상에 중국 역대 수도를 설명한 표가 있어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통일왕조인데 남북조로 잘못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동으로, 북으로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나라의 수도는 시안이다. 한나라의 수도는 시안과 뤄양이다. 수나라, 당나라 수도는 시안이다. 송나라 수도는 카이펑과 항저우이고 원, 명, 청대에는 베이징이 수도였다. 원나라 건국 초기 수도는 현재의 내몽골 지역이었고, 명나라 건국 초기 수도는 난징으로 각 왕조의 수도가 한 곳만이지는 않았다. 위의 표는 각 왕조의 '대표적인' 수도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수도의 위치를 보면 시안→뤄양→카이펑→항저우→베이징으로 동으로, 북으로 이동을 했다. 때로는 제국의 확장에 따라 자신감을 가지고 천도를 했고, 때로는 내분 또는 외부세력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천도를 했다. 원, 청대의 베이징으로의 천도는 전자에 속하고, 후한 시대 뤄양으로 천도와 남송 시대 항저우로의 천도는 후자에 속한다. 지역으로 보면 서에서 점차 동으로, 그리고 북으로 수도가 이전되었다.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를 보면 고대에는 시안, 뤄양이 수도였고 근대에는 베이징이 수도였다. 여기에 명나라 건국 초기, 중화민국 시기 수도였던 난징을 포함하여 시안, 뤄양, 난징, 베이징을 중국 4대 (역대) 수도라고 한다.



① 시안, 중국의 고도


중국에서 황하 주변의 지역을 중원이라고 부른다. 지금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허베이성, 산둥성, 산시성, 허난성, 그리고 또 하나의 산시성(섬서성)이 중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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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서는 춘추전국 시대를 포함하여 왕조간 세력 싸움이 치열했다. 진나라는 중원의 서쪽인 시안에 수도를 두고 관중과 사천(파촉)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중원의 치열한 각축전에서 보호받는 관중에서 세력을 키운 후 피폐해진 중원의 국가를 하나씩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을 하였다.  


진나라, 한나라(동한)의 수도를 시안으로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진나라의 수도는 지금 중국에 셴양시에 해당하고, 한나라와 이후 당나라의 수도는 지금의 시안시에 해당한다. 초나라 항우는 관중 지역을 점령한 후 진나라 왕족을 몰살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웠다. 유방은 나중 관중 지역에 도읍으로 정하기로 했으나 궁전은 셴양이 아닌 그 동쪽인 시안에 짓는다.


아래 관중 지역 지도 중 장안성은 시안시 시내에 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화청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2차 국공합작의 전환점을 만든 장쉐량의 시안사건(서안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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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뤄양, 제2의 고도


한나라 시기 정권 내 권력 투쟁이 심화되어 수도가 장안(시안)에서 뤄양으로, 다시 뤄양에서 장안으로 바뀌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한세조 유수는 외척 왕망을 무찌르고 도읍을 장안에서 뤄양으로 옮긴다. 후한 말 십상시의 난 끝에 정권을 잡은 동탁은 조조를 비롯한 반동탁 연합군을 피해 뤄양을 불태우고는 다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다.


뤄양은 삼국지 시기 위문제(조비, 조조의 셋째 아들) 때 위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한다. 그 후 남북조 시기 북조의 위나라(후위)의 수도이기도 하다.


수나라 때 수 양제 양광은 수도를 장안에서 뤄양으로 천도하려 하여 뤄양에 궁전, 운하 등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는 무리한 고구려 침공과 함께 수나라가 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당나라 시기 뤄양은 장안 다음 제2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뤄양은 황하를 끼고 있고 중원과 당시 수도였던 장안을 잇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뿐이 없었다. 장안(시안)과 뤄양은 운명을 같이 하는 중국의 두 고도古都라고 할 수 있다.



③ 난징, 중화민국의 꿈


난징은 삼국지 시기 오나라의 수도, 남북조 시대 북조 중 하나인 송나라의 수도였다. 명나라 건국 초기의 수도이기도 했다. 통일왕조의 수도로서의 역사는 길지 않다.


그래도 우리가 난징을 기억하는 이유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완료한 후 난징을 국민당 정권의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1926년 광둥성 광저우에서 출발한 국민혁명군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2년 만에 북벌을 완성한다. '중국 통일' 후 난징을 수도로 삼고 베이징(北京)은 더 이상 수도가 아닌 베이핑(北平)이 된다. 1927년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국민당 정부의 수도는 난징에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에 의해 중국의 수도는 우한(무한)을 거쳐 충칭(중경)으로 옮겨가게 된다.


난징의 또 다른 이름은 비극의 도시이다. 바로 난징대학살이다. 1937년 상하이에서 장제스의 정예부대를 꺾은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여 무차별적인 살인, 강간, 약탈을 하게 된다. 이때 희생된 사람 수가 3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소위 두 명이 재미 삼아 누가 더 많이 중국인을 참수를 하는지 경쟁을 하기도 한다. 그때 자랑스레 보도되었던 신문 기사가 증거가 되어 두 군인은 전후 군사재판을 통해 총살된다.  

  

(출처 : 위키피디아)



④ 베이징, 변방에서 대륙의 중심으로


베이징은 원래 중국의 변방 지역이었다. 베이징에 가면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증거이다. 한족보다는 북방민족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거란족의 요나라 수도, 여진족 금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에 있었다. 중국 통일왕조의 수도가 처음으로 된 것은 명나라 영락제 시기이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한 후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영락제는 주원장의 4남이었지만 황제가 되지 못하고 명나라 베이징에 거점을 두고 북쪽 변방을 수비하는 연왕에 봉해진다. (이곳은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가 있던 지역이다) 주원장(홍무제) 사후 영락제의 조카였던 건문제가 황제가 되자 건문제는 지역 제후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락제는 '정난의 변'을 일으켜 난징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베이징이 중국 최초로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는 순간이다.


청나라는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국가이다. 누르하치는 만주에 있던 여진족을 통일하여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준비한다. 하지만 명나라는 여진족이 오기도 전에 이자성의 난으로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청나라 군대는 아무도 수비하지 않는 베이징에 무혈입성한다.


역사는 국공내전시에도 반복되었다. 1949년 국민당 장군 푸쭤위는 베이징(당시 베이핑)을 수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황은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8년 장춘의 국민당군 10만 명이 공산군의 포위되어 몰살된 직후라 군인과 시민들의 공포감도 컸다. 푸쭤위는 공산당 당원이었던 딸을 통해 공산당과 밀실 협약을 맺고 공산군에 항복한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베이징에 무혈입성한다. 그 이후 현재까지 베이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다.   



참조

 - 中国历代首都

 - 중국 역대 주요 수도와 의의

 - 중국의 옛 수도

 - 洛阳

 - 푸쭤이

 - 이미지(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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