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오늘 이 편지는 “세상을 위해 곱게 빚어놓은 얼굴 말고도,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까지 상세히 묘사해 보자” 는 영지님의 말에 힘을 얻어 적어 내려가 봅니다.
다독가인 두 친구는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자기 계발서나 현실을 매섭게 꼬집는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소위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자자하게 읽히는 책이길래 그 반열에 빗겨 나고 싶지 않아서 호기심 반으로 읽어봤어요.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사회적 소수자와 소수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다수자라 일컬어지는 이들의 입지와 입장에 대해 이야기해요.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문득, 다수자는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이고, 차별주의자면 차별주의자이지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또 뭔가 싶네요.
아마 저자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쪽수가 많다고 무조건 다수자라고 볼 순 없지 않은가? 언제고 상황이 바뀌면 자신이 굳게 믿었던 다수자의 위치에서 소수자의 위치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는...
또한 스스로 차별주의자라 인정하지 않고(혹은 아닐 거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고),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지금, 우리 중 누구도 차별주의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은가? 의도하지 않았으니 백번 양보해서 당신은 선량한 차별주의자! 후후훗.
일그러진 얼굴을 용기 내어 드러내 볼게요. 사실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많이 불편했어요. 맞아요, 불편이란 표현이 적합해요. 책 속의 구절들이 마뜩잖았고,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고 분개하면서 얼굴이 붉어졌어요. 몇 번을 이 책을 그냥 덮을까 고민도 했어요. 이 책에 의하면, 저는 차별주의자이고 완벽한 능력주의자예요. 그래서 불편했던 거예요.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속속 지적하는 것만 같아서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달리 대우해야 한다는 생각,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공정함이자 정의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다. (...) 어떤 능력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측정할 것인지와 같은 판단은 이미 편향이 작용된 결정이다. 이렇게 선택된 방식으로 능력을 측정할 때 출제자의 편향이 응시자 중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p104-111
금수저로 태어났든 개천에서 용이 났든 학업 성적이 좋고,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경제력이 출중한 사람들을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그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더 넓은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어요.
자본주의 사회니까요.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곧 힘이고 그 사람의 능력(혹은 지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수단이자 잣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에 치우쳐서 민주주의를 잊고 있는 것 같아요. 책에서는 평등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 완벽한 평등의 시대는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늘과 실 같은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를 베어내기엔 우리 사회에 너무 깊은 뿌리를 내려버렸잖아요.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 시외버스에는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표를 사도 버스를 탈 수가 없다. 타인이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어떤 것, 여기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특권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p28-29
저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시외버스 하나에 얽힌 저의 특권을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이예요. 장애인 지원 예산을 늘려 달라는 시위를 보며 “예산을 얼마나 더 확보해줘야 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고요,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는 사람을 보고 “도대체 저 사람이 원하는 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예요. 장애인이 된 것은 장애를 얻은 이들이 나보다 운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치부했었어요. 길에 지나가는 장애인을 동물원의 동물 보듯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는 것만으로 제 몫을 다 했다고 생각했고, 이성애자들이 당연히 ‘올바른’ 성향의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의문도 들었어요. 장애인들 중에는 “나를 일반인과 똑같이 대해달라” 하는 사람도 있고, 비정규직들 중에는 “나는 비정규직인데 정규직만큼 중요한 업무를 할 필요 없잖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책에서 표현하는 대로) 다수자들이 소수자들을 알게 모르게 차별하는 것도 자각하고 개선해야 할 과제이지만, 소수자들이 다수자들의 손길에 날을 세우지 않는 것 또한 과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선량한’ 차별주의가 만연하기에 날을 세우겠지요. 하지만 책의 문장 일부처럼 아무리 평등하고 공정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겐 유리하고 누군가에겐 불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소수자들만 불리한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에서 말하길 저처럼 생각하는 게 특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거래요. 그래서 제가 얼굴이 벌게져서 “응?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라고 투덜댔어요.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면서도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건, 전에도 얘기했었죠? 저는 관대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요. 도대체 내가 하는 행동들 중 차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야 최소한 모르고 차별을 일삼는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러려면 잘못을 시인하고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잖아요.
네, 부끄럽지만 저는 차별주의자가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차별주의자인 저를 (심지어 차별을 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사람인 저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어요. 일그러진 제 얼굴을 솔직하게 보여드리려고요. 나아가 저를 단속하고 다잡고 싶어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저도 넉넉하게 모두를 품는, 다소 느슨하지만 낯선 것을 품을 수 있는 여유로운 나를 만들고 싶어요.
매사가 그렇듯 어느 한쪽만 노력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관계여야만 길게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간에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끈끈한 연대감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친구들이 잠시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구절이에요. 성소수자(퀴어)의 광장 시위가 있던 때를 비유하며 저자가 쓴 구절이에요.
소수자의 ‘말 걸기’에 다수자가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시위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시위에 동참해 함께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화답하겠는가? -p168
친구들이라면 어떻게 화답하시겠어요?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민주적이고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이 되길 기대하며,
오늘이 내일보다 조금 덜 민주적이고 조금 덜 평등한 차별주의자인
리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