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좋아 2
남들은 은사님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와 같은 분이 있다. 대학교 교수님이지만 절친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교수님과 제자 사이를 망각하곤 한다. 20살 새내기 시절은 어떤 글에서도 똑같이 묘사된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암흑기'
건강과 인간관계도 하물며 생활 여건도 어려웠던 시기였다. 대학 캠퍼스 생활의 낭만보다는 완벽주의, 강박의 시발점에 서있었고 하루도 나를 못살게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숨구멍은 교수님과의 대화였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교수와 학생과의 거리와 권위는 노크 소리에 있다고 본다. 우린 방문을 노크하는 곳이면 일단 긴장하곤 한다. 친한 친구 집에 방문을 두들기지 않듯이 노크라는 행위는 배려이자 권위를 보여주지 않나 싶다. 교수님의 오피스에 가기 전에도 노크를 필수였다. 하지만 한 번도 노크를 하면서 긴장했던 적이 없었고 늘 웃으며 노크를 했었다.
교수님과의 대화는 그리 낭만적이지도 깊이 있는 대화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일상에서의 웃음 섞인 이야기들만 오갈 뿐이었다. 1-2시간 대화를 하고 나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이야기. 그냥 그 자리에서 하면 웃음을 유발하는 대화만이 오갔다.
한 날은 교수님의 오피스에서 대화를 하다 나와 교수님 모두 안면이 있는 학생을 보게 되었다. 나를 향해서 "코딩에도 관심이 있었어요?"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었다. 전산 쪽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학생의 대화면 충분히 그런 생각으로 기울어지기도 쉬웠을 터. 하지만 대체로 교수님과 어제 먹었던 학생 식당의 돈까스가 참 별로였다와 같은 실없는 이야기만 오갔을 뿐이었다.
권위가 없을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 생기는 고집과 아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많고 적음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나이가 들어 내가 교수님과 비슷한 또래가 되었을 때 나와 같은 학생, 청년을 어떻게 대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대체로 그런 생각을 하면 끝은 부정에 가깝다. 그리 다정하지 못했을 것 같고 웃으며 대화를 편하게 나누기도 힘들 것만 같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곤 한다. "다시 대학을 온다고 해도 이곳으로 왔을 거야?" 그 물음에 저학년에는 고민을 해본다고 했었으나 현재는 아니다.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교수님이 있다.
좋은 어른을 참으로 많이 만났다. 한 분을 만나도 감사한데 정말로 여러 분을 만나고 조언도 얻었다. 나를 애정해 한 끼를 사주시며 다음을 기약하는 분도 있었고, 나의 재능에 감탄하며 일자리를 추천하시는 분도 있었다. 그런 다정함을 어디 가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지금 시대엔 어려울 것만 같다.
대학에서 만난 좋은 어른의 모습을 한 교수님들처럼, 나도 그렇게 나이 들 수 있을까 자주 묻는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쉽게 바뀌긴 어렵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 '나도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품는다. 쉽지 않으나 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 정도는 괜찮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