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내 이름은 혜원.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 온 지 8년쯤 되가는 마흔 네 살 여자 사람이다. 이민생활에 적응하며 아가들 키워내느라 몇 년을 훌쩍 보냈고, 두 어린이가 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나도 내 인생 2라운드를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뉴질랜드의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대학원을 들어갔고 2년간의 늦깎이 공부를 어찌어찌 잘 마쳤다. 달콤하지만 속이 타는 몇 개월의 백수생활을 지나 정말 들어가고 싶던 회사에 입사를 했다. 일 하는 것도 돈 버는 것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어쩐지, 모든 게 너무 잘 굴러가더라니!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을 굳게 믿는다. 15년 전 다이어리에 빼곡히 기록해 놓은 마음들은 지금 펼쳐봐도 나를 당장 그 때의 시간과 공기로 데리고 가 주는 마법을 부린다. 두 아이가 어릴 때는 인스타그램을 종종 했는데, 그 때 올린 사진들은 지금 봐도 너무 이쁜 사진들이고, 그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글들 또한 짧지만 내 눈에는 꽤나 사랑스럽다. 한창 귀요미 아이들을 보는 행복한 엄마가 쓴 글이니 어련할까.
나름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수십 년 전 감성이 폭발할 때 싸이월드에 끄적인 글들을 보고 라디오 막내작가라도 해보는 거 어떻겠냐는 어느 피디분의 제안에 사실 설렜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책장에 가나다순으로 싹 꽂아놓은 것 마냥 글을 쓰고 나면 머릿속이 좀 더 가지런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쓰자면 소재는 많았다. 맨 땅에 헤딩한 이민 생활 정착기도 그러했고, 눈물 콧물 없이는 못 들을 이민자 아줌마의 대학원 생활도 그러했고, 안 되는 영어로 되는 척 하느라 바빴지만 무척이나 재미있는 뉴질랜드 직장일기도 그러했다.
하지만 못 썼다. 아니, 안 썼다고 하는 게 맞겠다. 가끔은 이 귀한 시간을 기록해놓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키워드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기도 했다. 단어들은 쌓였지만 결국 풀어내지를 못했다. 투명한 유리뚜껑 안에 옥수수가 팡팡 터지며 팝콘이 되었는데 따뜻할 때 꺼내 먹지를 못했더니 이젠 아주 못 먹게 되어버렸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루의 삶을 쳐내느라 바빠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내 우선순위가 글쓰기는 아니었으니, 그만큼 쓰기에 절박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근 몇 년은 암 때문에 그리도 피곤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그냥은 못 지나갈 소재가 와 버렸다. 암이라니.
감사하게도 몸이 많이 아프지는 않고, 게다가 지금 나는 휴직 중이라 한가하기까지 하다. 몸을 잘 회복하려고 일을 쉬는 기간인데, 글쓰기를 회복하면 몸도 더 잘 회복될 것만 같다. 내 인생에 갑자기 닥친 이 놀라운 계절을 어떻게 명랑하게 지나왔는지 꼭 남겨두어야겠다.
며칠 전 첫 치료를 가던 날, 여덟 시간 꼬박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해서 책을 한 권 챙겼다.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
이 책의 부제는 이러하다.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안 써 버릇 하다 보니 못 쓰게 되었고, 2년간의 대학원 생활은 평생 P로 살아온 나를 J로 바꾼 것도 모자라 정말 쓸데없는 완벽주의자로 만들어버려서 도대체가 첫 문장을, 첫 문단을 시작할 수가 없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뭐라도 써보자. 뭐라도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나의 기억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따뜻하게 지배할 그 기록을 이제 다시 해 보자.
이제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보겠노라는 말을 참 장황하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