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이냐 임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PET-CT를 찍고 2주쯤 후, 다시 스페셜리스트를 만났다.
현재로서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경과 관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후 한결 마음 편하게 지냈는데, 오마이갓, PET-CT 결과는 종괴가 9.2cm 라서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한단다.
자꾸 결과가 이리저리 널을 뛰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실 기준치에서 겨우2 mm 모자란 수치였기에, 마음 한켠으로는 뭐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하면 어떨까 싶기도 했던 터라 담담히 받아들였다.
Tom은 치료 옵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기본으로 사용되는 표준치료는 항암치료이다. 리툭시맙Rituximab 이라고 하는, 20년 이상 임상에서 사용되어 온 매우 효과적인 B세포 표적치료제를 기본으로 사용한다. 여기에 몇 가지 항암약물을 더하는데 나의 경우 벤다무스틴 Bendamustine 이라는 항암제를 쓸 거라고 했다.
그리고 대망의 임상실험 Clinical trial이 있다. 임상 실험은 그 단계에 따라 3상으로 나뉘는데, 1상은 소규모로 약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2상은 중간 규모로 실제 약의 효과가 입증 되는지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3상은 큰 규모로 기존의 약보다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말하자면 허가 받기 직전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상식일 수 있지만 나는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죽을 때 까지 몰랐을 수도 있는 정보들이다. 이 임상실험은 3상이었고, 그건 일단 안전하다는 말이었다.
사실 Tom이 이 임상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서 논문을 하나 보여주었을 때, 나는 속으로 정말 놀랐다. 내가 찾아본 좋은 림프종 약물들 중에 엡킨리 Epkinly 라는 혁신적인 약이 있었지만, 새로 진단받은 여포성 림프종에 사용은 커녕 허가에 관한 자료조차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쉽지만 아예 후보로 생각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상의 옵션 중에는 이 엡킨리와 리툭시맙, 그리고 다른 약들을 함께 쓰는 몇 개의 조합이 있었다. 하나님은 정말이지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신다.
Tom은 확신에 찬 눈코입으로 여러 번 강조했다. 진짜 좋은 약이라고. 이거 네가 뽑히면 좋겠다고. 확률이 약 50:50이니까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그렇다. 뽑혀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임상실험에서는 참가자를 어느 그룹에 무작위로 배정하기 위해 컴퓨터로 추첨 randomisation 을 한다. 연구자가 임의로 배정을 하게 될 경우의 편향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성별, 나이, 건강상태, 병기 등등이 최대한 공평하게 나뉘도록 컴퓨터로 배정된다. 이 임상은 오픈 라벨로, 일단 배정이 되면 내가 어떤 약으로 어떤 그룹에서 임상에 참여하고 있는지 환자와 의료진들에게 모두 공개된 상태에서 진행한다.
Tom은 임상에 관련된 정확한 자료와 동의서를 이메일로 보내 줄 테니 잘 읽어보고 다음에 만날 때 결정하자고 했다. 그날 오후, 약 50페이지가 넘는 안내자료가 왔다. 읽다 보니 어느 한 문장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Follicular lymphoma remains an incurable disease and the cancer usually comes back at some point or will not get better with treatment.
여포성 림프종은 완치가 어렵고 재발이 잦으며 불응성이 되기도 한다.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렇게 확인사살을 하니 다시 한 번 잠시 다운이 되었다. 활자의 힘이 이렇게나 크다.
이 만남이 2025년 12월 초였으니 다음 만날 때라 함은 또 한달 정도 후일 것이었다. 1월 첫 주에 잡아 놓은 캠핑 일정이 영 마음에 걸렸다.
뉴질랜드는 대부분의 회사가 연말~연초에 2주정도 쉬고 거기에 개인 휴가를 붙여 더 쉬는 사람들도 있어 12월 중순부터 1월 중순까지는 그냥 온 나라가 휴가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도 친한 가족과 이 시기에 늘 캠핑을 가는데 이미 오래 전에 예약을 해 놓았고 네 명의 아이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기에 차마 취소하자고 할 수가 없어서 병원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캠핑 기간에 딱 걸렸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병원 일정을 미루어 달라고 했다. 이유는 내가 이제 내 병을 아는 까닭이다. 검사를 할 때마다 결과지가 나오고, 스페셜리스트를 만날 때 마다 스페셜리스트가 나의 현재 상태를 GP에게 자세히 이메일로 알려주는데, 그 때 마다 나도 참조해서 보내준다. 업데이트 되는 문서들을 보다가 발견한 "Ki-67 : 1%"
Ki-67은 암세포가 얼마나 빨리 증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런 거 모르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기왕 알게 되었으니 나의 박식함(?)을 널리 알려보련다.) 나의 경우 이 수치가 1%라는 것이다. 암세포가 100개가 있다면 그 중 1개만 활동한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온 몸의 림프 노드가 부어있고 1 cm 미만의 작은 것부터 9cm 가 넘는 큰 것까지 여러 개의 다양한 병변이 여기저기 산발해 있는데 이렇게 느리게 증식한다는건 대체 얼마동안 이 암세포들이 내 몸 속에 있었다는 말일까. Tom에게 물어보니 최소한 몇 년은 있었을 거란다. 이쯤 되면 내가 내 몸을 잘 안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 정 반대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재의 상태만큼은 정확히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과감하게 병원을 미루었다. 다행이도 많이 미루어지지는 않고 2주 내로 다시 잡아주어 다음 예약은 1월 중순.
이제 크리스마스와 캠핑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