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큰 아버지는 방학 동안 나와 동생을 울산에 초대해 몇 주 머물고 가도록 권했다. 나는 그곳에서 첫 생리를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신생아의 평균 키보다 5cm가 컸던 나는 부지런히 자라, 전교에서 손에 꼽히는 키가 큰 아이가 되었다. 신체가 자라는 속도만큼 2차 성징이 서둘러 나타날까 봐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나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남동생을 나란히 앉혀두고 성교육을 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난데없이 핏덩어리를 보게 되었을 때,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생리를 시작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큰엄마는 허둥대며 생리대와 새 팬티를 꺼내 화장실에 넣어 주었고 나는 침착하게 생리대를 속옷에 붙여 입고 거실로 나왔다. 사촌오빠는 내가 쑥스러워할까 봐 동생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유리병에 빽빽이 꽂혀 있는 카라 꽃을 응시하며 부모님이 울산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리고 꽃다발을 손에 든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어머니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왔다.
“케이크도 사 올라고 했는데, 너거 엄마가 하도 안 사가도 된다 캐가.” 엄마의 성화에 결국 사 오지 못한 케이크가 내내 마음에 걸렸는지 아빠는 자꾸만 케이크를 구시렁거렸다. 그러고는 아직 어린 너에게 빨간 장미가 어울리지 않아 연분홍색 장미를 골랐다며, 13살의 딸에게 13송이의 장미꽃을 건넸다.
“우리 딸, 진짜 여자가 된 걸 축하한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꽃다발이었다. 여린 색이 무색하게 짙은 향기를 품은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멋쩍어하면서도 어쩌면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아서 조금 뿌듯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생리는 대단한 일이기보다 대단한 고통이었다. 아기가 주는 기쁨 따위가 얼마나 경이로울지 알 바가 없지만 내벽을 부풀렸다 부수는 자궁의 악질적인 취미로 인해 매달 찾아오는 통증은 지나치게 명료했다. 진통제가 없이 출근을 했다가 지하철 바닥에 쓰러질뻔한 뒤로는 손 닿는 곳 어디에든 약을 쟁여야 마음이 놓였다. ‘왜 한국에는 대량 포장된 진통제를 팔지 않는 걸까?’ 나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50살까지 생리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800여 일을 아랫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할 것이다. 통증을 줄여주기는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는 그 약을 먹어도 식은땀을 흘리며 잠들거나 선명한 통증에 잠이 깨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평생 동안 최소 3,500개의 캡슐을 먹을 것이다. 안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아주 지긋지긋하다.
나는 여러모로 생리가 싫다. 검붉은 색으로 엉겨 붙은 생김새도 소름 끼치고 생리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도 짜증이 난다. 한 달에 일주일은 기저귀 신세를 면할 수가 없고 습진까지 생긴다면 최악이다. 쾌적한 환경조성을 위해 생리컵이나 탐폰도 써봤지만 뭣하나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발 여름만이라도 건너뛰어 주면 안 되겠니?’
아기를 낳을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눈치 없는 난자는 배란일을 잊지 않고 챙긴다. 별 필요도 없는 자궁을 떼어 버리면 안 되냐는 물음에 엄마는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며 나의 등짝을 패뜨렸다. 내일 당장 임신을 해도 노산인데 엄마는 아직도 나의 임신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정말, 이 세상에 폐경을 기다리는 이는 나뿐일까? 이제 나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에 진절머리가 난다.
살아가는 날동안 피할 수 없는 통증을 견뎌야 할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엄마가 믿는 하느님 아버지는 이브에게 출산을 벌로서 겪게 하셨다. 잉태의 실패작인 생리는 원죄의 파편임이 틀림없다. 나의 아버지가 현명했다면 유독 날카로운 파편만을 골라잡는 딸에게 열세 송이의 축하대신 위로를 건네었을 것이다. 아직도 혼자서 겪어야 할 온전한 내 몫의 고통에 넌더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