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아무나 되나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by 달빛달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가라는 직업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는 것이 맞겠다. 언제나 감성, 이상보다 논리, 효율, 이성을 택하는 나의 천성 때문에, 답이 깔끔하게 나오는 것(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속 시원했고 편했다. 내 앞에 놓였던 학점, 취업, 보고서 작성 등에서 그런 성향 덕을 많이 보았다. 학교나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치, 이론 등으로 살을 붙이고 분석하여 정리하는 포맷에 익숙했던 나에게 ‘문학하는 마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내 삶에 시장과 회사의 언어(재료비가 얼마고, 프로모션 비용은 어떻게 태우고, 손익은 그래서 얼마가 남는 등의)가 걷히고, 가족과 나만이 오롯이 남자 신기하게도 소설이 나에게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설은 살아있는 삶의 언어로 가득 차 있었다. 소설 속 인물에 이입하고 공감하는 순간들이 늘어날수록,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한 마음도 커져갔다. 나 같은 사람도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이성과 현실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또렷한 나같은 사람도?




자신만의 문체와 세계관을 형성하며 21세기 소설을 발명했다는 평을 듣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답을 줄 수 있을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자칫 고루해보이는 제목의 이 책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재즈 카페를 운영하던 그는 1978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야쿠르트 타자가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날 밤부터 가게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하루키는 이 소설로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다. 이후 ‘노르웨이의 숲’,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태엽 감는 새’,‘1Q84’ 등을 발표하고 일부 작품이 전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쌓아왔다.

이 책은 하루키가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 배경부터, 문학상을 둘러싼 논란,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찾은 과정, 체력과 시간 관리, 소설의 소재, 등장인물, 시제, 해외 진출 등 소설가로 살아오며 느낀 소회와 소설에 대한 생각의 총체를 담은 업세이이다.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이 소설을 쓰는 일을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을 사용하여 유물을 발굴하는 것에 빗댄 것처럼, 하루키 역시 이 책에서 내면에서 소설을 끄집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설가에게 없어서는 안될 기초체력을 키우는 방법부터,

뛰어난 소설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소설도, 혹은 별 볼일 없는 소설도 (전혀) 괜찮아요,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수많은 뛰어난 문장을 만날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어떤 인물이나 사상의 흥미로운 세부 정보를 원재료 삼아 머릿속 캐비닛에 최대한 축적해두고 끄집어 내는 방법.

아무튼 우리의 머릿 속에서-이라고 할까, 최소한 내 머릿속에는- 그런 큼직한 캐비닛 설비가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서랍에는 다양한 기억이 정보로서 채워져 있습니다. 큰 서랍도 있고 작은 서랍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감춰진 포켓이 달린 서랍도 있습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필요에 따라 이거다 싶은 서랍을 열고 그 안의 소재를 꺼내 스토리의 일부로 사용합니다. 캐비닛에는 방대한 수의 서랍이 있지만, 소설 쓰기에 의식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어디의 어떤 서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머릿속에 서랍의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떠올라 한순간에 무의식적으로 그 소재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1인칭 시점의 작품을 쓰다가 3인칭으로 시점을 확장한 이야기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소설이 삼인칭이 되고 등장인물의 수가 불어나고 그들이 각각 이름을 얻는 것에 의해 이야기의 가능성은 뭉클뭉클 커졌습니다. 즉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색깔의, 다양한 의견이나 세계관을 가진 인물을 등장 시킬 수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다종다양하게 얽혀드는 양상을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진 것은 나 자신이 ‘거의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인칭으로 글을 쓸때도 ‘거의 누구라도 될 수있다’는 감각은 있었지만 삼인칭이 되자 그 선택지가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그의 표현처럼 세상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일반적인 소설가의 이미지(퇴폐적이고 마음 내키는대로 살면서 가정도, 자신도 돌보지 않는 반사회적인 문인)와는 전혀 다른, 자기 관리가 철저한 모습은 반전이었다. 이사크 디네센의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는 담담하게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쓴다고 했다. 하루에 네 다섯시간 책상을 마주하며 하루에 20매를 쓰면 한달에 600매, 6개월이면 3,600매(해변의 카프카 초고)가 나온다고. 또한 삼십년 넘게 거의 매일 한시간 정도 달리기나 수영을 습관처럼 해오며 체력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회에서 그가 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즉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현역 레슬링 선수도-즉 이 경우는 소설가에 해당하는데-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어느 정도 포기해버린 상태라서 ‘좋아요.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쇼’ 라는 기풍이 있습니다. 개방적이라고할까, 손쉽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 한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입니다.

하루키는 전업작가로서 살아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며 링에 오르기는 쉽지만 오래 버티는 건 어려운 일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지만, 한 번쯤은 그 링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왈칵 솟아오르는 책이었다. 링에 올라, 하루키의 환영을 받을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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