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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Nov 29. 2020

술고래 도깨비 2

로얄샬루트

서울 밤하늘에 더 이상 별이 뜨지 않은 이후, 도시에 살던 마법과 동화는 모두 사라져 버렸어. 별이 빛나는 밤의 전설이 무너지던 날. 수많은 별은 추락해 도시의 현실이 되었지. 서울의 야경은 그렇게 채워진 거야. 새로운 별빛이 된 거지. 그 옛날의 별빛이 궁금하다면 야경을 보면 돼. 낭만은 없지만 이젠 가질 수 있잖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코스모폴리탄, 마이타이, 애플 마티니, 피치크러쉬. 늦은 밤이면 그곳에서 칵테일을 시켜. 조명에 비친 칵테일은 보석처럼 빛이 나지. 야경과 함께 놓인 칵테일은 마치 별빛 하나를 담아둔 것 같아. 그건 퇴근 후 최고의 사치가 되어주지.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며 깊고 천천히 서울의 별을 들이키는 거야. 그리고 그 맛은….     


‘윽 개써!!!’     


어릴 적. 엄마가 외출하면 아빠는 몰래 숨겨둔 술을 꺼내 마시곤 했어. 마른안주와 로얄샬루트. 그리고 아빠의 그 행복한 표정. 나는 옆에서 마른안주를 집어먹으며 아빠의 술잔을 채워주곤 했지. 꼴깍꼴깍 술 따르는 소리와 함께 슬며시 퍼지는 향긋한 냄새. 거기에 엄마 몰래 아빠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배덕감. 아빠는 자주 엄마에게는 비밀이라며 사정을 했어. 그리고 최고로 친절한 아빠가 돼주었지. 그 짧은 해프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어. 아빠는 효녀라며 나를 한껏 칭찬해줬지. 어린 나는 궁금했어. 저 잔 속 노랗고 붉은 음료가 도대체 뭐길래 아빠가 이러는 걸까.     


“아빠. 그게 맛있어?”

“그럼! 모든 부분에서 제일 맛있지. 고기보다 과자보다 콜라보다 훨씬 맛있지”

“나도 마셔도 돼?

“안돼, 이거 아빠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나도 내꺼 줄게”

“니껀 맛없어. 아빠께 이미 제일 맛있는데”

“치사하게”

“우리 딸내미. 더 크면 그때 줄게. 대신 다른 사람 말고 꼭 아빠랑 마시는 거다. 약속!”

“알겠어. 약속”     


그리고 시간은 지나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결국 치우지 못한 아빠의 수납장을 정리하다 아빠가 숨겨둔 양주를 발견한 거야. 스카치블루, 시바스리갈, 윈저, 그리고 로얄샬루트. 한동안 찾지 않은 양주들은 먼지가 뽀얗게 앉아 죽은 듯 자리하고 있었지. 나도 아빠처럼 엄마 몰래 양주를 머그잔에 따라본 거야. 그리고 편의점 과자들을 가지고 내 방으로 몰래 들어갔지. 모양이 좋진 않지만 이건 예습이니까. 처음부터 훌륭하진 않아도 괜찮지 뭐. 그리고 한입을 홀짝.      


이건 뭐야! 나는 술이 아빠 말처럼 맛있을 줄만 알았어. 하지만 아빠의 로얄샬루트는 목에서 타들어 갔고, 양주의 독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상과 다른 술의 배신 때문인지 나는 눈물이 찔끔 낫지. 이건 마치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식히기 위해 푸른 바다에 놀러가 발을 담가보는데, 상상과 다른 따듯한 바다의 온도를 직면했을 때의 배신감 같던 거야. 술의 첫인상은 하마터면 내 추억을 거의 파괴할 뻔했어. 도대체 아빠는 어떻게 이런 걸 마신 거지. 침착하자. 아직 제대로 된 술을 마시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분명 맛있는 술은 존재할 거야.     


마침내 대학교 입학. 성인이란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나는 온갖 술자리에 끼어들었어. 소주, 맥주, 와인, 사케, 막걸리, 그리고 그렇게 꿈꾸던 위스키까지. 하지만 그 모두는 내 상상에는 부족했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쓰고 텁텁했지.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맛없음이 선명할수록 정신은 또렷해진다는 거였지. 취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숙취도 없었어. 그리고 학교에선 무서운 신입생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나는 급기야 술 잘 마신다는 선배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어. 어떤 술이 있는지, 어떻게 마시는지, 안주는 어떤 게 어울리는지 등등. 술에 관한 잡다한 것들을 배워나갔지. 하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았어. 나의 사부들은 금방 지치기 일쑤였고, 결국 뒤처리만 해야 했지.     


오늘은 서촌이었어. 종목은 막걸리였고. 나는 자리를 나와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려 보았지. 서촌거리. 늦은 밤이지만 서울의 별은 빼곡하네. 하지만 이곳에서도 내 별을 찾진 못할 거야. 상상 속 달콤한 술은 컴컴한 서울의 밤하늘 같은가 봐. 둘 다 텅 비었거든.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그 속에 예쁜 술잔을 그려봤어. 거기에 달콤한 색의 술을 따를 거야. 노랗고 붉은빛의 그런 술을. 그리고 언젠가 서울에도 불이 꺼진다면 다시 떠오를 별빛을 내 술잔에 담을 수 있겠지. 그때는 비로소 홀짝 들이킬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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