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뿌리는 초록색 눈들로 만든 눈사람이 스케치북 가운데에 있었다. 머리, 몸통, 다리. 세 개의 둥근 눈 뭉치들로 만들어진 눈사람은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비가 와요.
오른쪽 옆에 파란색 사선들이 눈사람을 향해 들이치고 있었다. 눈사람 위에도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 왔는데 비도 오는 거야?
내 물음에 사랑이가 대답했다.
-네.
-어떡하냐. 그러면 눈사람이 힘들 텐데.
-그래서 눈사람이 녹고 있어요. 검게 변해가고 있어요.
-아이고, 그렇구나. 예쁜 눈사람이 녹았네.
나는 짐짓 안타깝게 맞장구 쳐주었다.
-눈사람이 녹아물이 되어 바닥에 깔렸어요.
8월의 눈사람은 스케치북 바닥에 넘실대는 푸른 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른쪽 위에 있는 이건 뭐지?
나는 스케치북 오른쪽 귀퉁이 노란색을 가리켰다. 초록색 눈사람도, 푸른 물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노란색이었다. 어쩌다 덧 붙인거려니 했는데 그에 대한 설명도 사랑이는 준비되어 있었다.
-아, 그거요? 그건 블랙홀이에요
블랙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어리둥절했다. 블랙홀이라는 단어를 다섯 살 아이 입에서 듣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게 뭔지는 아는 걸까?
-블랙홀이 뭐야?
-눈과 비가 온 곳이에요. 눈과 비는 블랙홀에서 왔어요.
-오, 그렇구나. 눈과 비는 블랙홀에서 온 거였구나.
사랑이는 자신의 그림에 우주를 담고 있었다. 아이의 8월에는 초록색 눈이 내렸고 그 눈을 녹이는 비도 내렸다. 푸른 물 넘실대는 땅이 있었고 허공에는 블랙홀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는 블랙홀을 검은색 대신 밝고 희망적인 노란색을 사용했다. 사랑이의 블랙홀은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시작하게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