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참. 이렇게나 무섭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그러다가 오랜만에 공을 들여 SNS를 확인하니 온통 한국의 함박눈 사진과 영상들이 가득이다. 까만 하늘을 하얗게 채우며 내리는 눈을 맞으며 산책길에 첫 발자국을 내는 사진. 책에서만 봤다며 스노우 엔젤을 신나게 만드는 아이의 사진. 주둥이에 동상 걸릴 것 같이 세상의 모든 눈을 맛보는 강아지 사진. 차분히 창 밖 풍경으로 눈을 보며 내일 아침 출근길을 걱정하는 사진. 뒤처리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노는 것도 때가 있다며 눈 밭에 세 아이들을 풀어놓은 사진. 언덕 위에 세워 둔 차가 걱정은 되지만 내심 가지 못하는 눈나라를 서울 한복판에서 만나 반갑다는 사진. 차를 회사에 두고 느림보같이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도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고 찍은 눈 가득한 차도의 사진. 유행하는 오리 틀로 찍어낸 눈 오리로 찍은 감성 사진. 사진. 사진들...
내가 사는 북쪽 캘리포니아는 겨울을 Rainy season이라고 부른다. 이 곳은 일 년 중 8, 9개월 정도 일기예보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한결같은 날씨를 가지고 있다. 햇살은 바삭바삭 부서질 것 같고, 그늘에 들어서면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날씨이다. 3월의 낮부터 살금살금 햇살이 따듯해지기 시작하다가 4월쯤부터 본격적으로 반팔을 입는다. (물론 많은 튼튼한 사람들이 1년 내내 반팔과 반바지를 입기도 한다.) 5월이 되면 슬슬 지금부터 이렇게 더우면 여름은 어쩌나 하는 걱정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또 거기서 더 더워지는 법 없이 6월에서 9월 정도까지 2, 3주의 무더위를 제외하고는 덥다고는 하지만 밤이 되면 서늘해지고, 낮에도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쾌적한 날씨이다.
이렇게 비는 거의 오지 않고 건조하고 따듯한 날씨가 계속되다 보니, 그 끝은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산불' season이다. 8월쯤 되면 주변 캠핑장들은 산불 위험으로 캠프파이어를 금지한다. 아주 작은 불씨도 여의도 면적의 몇 배가 되는 땅에 순식간에 불을 붙이기 충분한 상태로 캘리포니아의 온 땅은 바짝 말라 버린다. 4월쯤에는 파릇파릇 알프스 부럽지 않게 푸르던 언덕들이 '내가 언제?' 하는 느낌으로 한 달 사이에 누렇게 변해간다.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기후 변화의 속도를 몸으로 느낀다. 9월쯤부터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를 기다린다. 그렇게 빠르면 11월, 늦어도 12월쯤엔 시작되는 것이 Rainy season이다.
겨울이라고 하지만 평균 낮에는 15도, 밤에는 5도의 정도의 날들이 계속된다. Rainy season이라고 하지만 비도 점점 적게 오는 추세이고, 그마저도 밤에 오고 오후엔 맑아지는 경우가 많다. 뭐든 쉽게 볼 수 없으면 귀해지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소리는 촉촉하고, 흐릿한 하늘은 반갑다. 한국에 살 때 비는 나에게 대체로 끈적이고 더운 여름에 내리고, 꿉꿉한 상태가 일주일을 넘게 가고, 그런 날 지하철을 타면 막 역한 냄새가 올라오고 뭐 그런 이미지였다. 이 곳에서의 비는 바짝 마른땅을 적시고, 땅의 색을 며칠 사이에 초록색으로 되돌려주는 고마운 비이다. 땀 한 방울 내보내지 않고 지나간 여름의 바짝 마른 모공들을 촉촉하게 열어주는 젊은 비이다. 폭폭 끓여 먹는 갈비탕, 곰탕, 꼬리탕을 만들기에 어울리는 비이다. 매일매일 당연했던 눈부신 햇살을 잠시 쉬어가는 쉼표 같은 거다.
처음부터 모르고 살았으면 '우와'로 그칠 것을 30년 넘게 알고 살던 거라 사무칠 때가 있다. 함박눈은 그렇게도 가득 찬 느낌으로 내려오는데, 큰 소리 내지 않고 빠르게 세상을 덮어버린다. 켜켜이 쌓여 사물의 없던 윤곽을 드러내고, 있던 윤곽을 덮어 버린다. 다음 날 우리에게 끼칠 불편을 뻔히 아는 모두의 마음을 그럼에도 설레게 한다. 눈을 한창 맞고 있어도, 그저 창 밖으로 보고 있어도 이상하게 세상이 조용해진 느낌을 준다. 그리고 함박눈이 내리던 수많은 날들 중의 하나를 골라 추억에 잠기게 한다. 고요하고 우아하다.
먼 훗날에 혹여라도 언젠가. 지금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살게 되더라도, 나는 아마 이미 알아버린 매일매일 당연한 캘리포니아 햇살과 우기에 오는 촉촉한 비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모르고 살았다면, 그리워하거나 사무칠 필요도 없는 무언가 들이 참 많다. 아는 날씨. 아는 풍경. 아는 맛. 아는 그거...
인생을 쪼개어 터를 바꿔 살다 보니, 어쨌든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번 생의 숙명이 되어 버렸다.
'아는 것'이 참. 이렇게나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