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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비로운별 Dec 20. 2021

할머니의 기싸움

우리 할머니께서 이겼으면 좋겠다만

엄마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고, 그 작은 고철덩어리에서 나오는 벨소리는 집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주인공은 바로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엄마와 할머니는 하루에 한 번씩 통화를 하시는 게 일종의 루틴이기 때문에 이 날도 여느 때처럼 엄마와 딸의 통화가 시작됐다.


엄마의 목소리는 워낙 크고, 이 놈의 집은 방음도 잘 안 돼서 듣고 싶지 않아도 통화 내용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늘 반복되고 따분한 일상을 서로 공유하는 듯했는데, 엄마가 말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니 아무래도 내 이야기인 듯했다.


"에이 아니야 엄마~ 그냥 정장 입고 갔다 온 거래~"


엄마와 할머니는 얼마 전 내가 대선 후보 간담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 12월 초, 서울권대학언론연합회에서 김동연 대선 후보와의 간담회를 진행했는데, 나는 학보사 기자였던 지라 감사하게도 참가 자격이 주어져 다녀왔었다.


나름 무거운 자리인 것 같아서 정장을 입고 갔고, 간담회가 끝난 뒤 김동연 대선 후보님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스스로 뭔가 뿌듯해서 이 사진을 엄마한테 보냈었는데, 아무래도 누군가가 할머니께 보여드린 모양새였다. 휴대전화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할머니께서 이 사진은 어떻게 보신 건지 내가 대단한 곳에 갔다 온 거냐고 엄마에게 물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께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엄마에게 사실 확인(?)을 하셨던 이유가 어렴풋 짐작 가는 듯했다. 할머니께서 시장도 다니시고 한글을 배우기 위해 노인 대학도 다니시는데, 여기서 또래 할머니들을 만나면 하는 대화의 주된 소재가 손주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다른 할머니들께서는 손주의 취업 소식을 들고 오며 자랑을 하신다는데 우리 할머니는 아무래도 대화 소재(?) 면에서 밀리시는 듯했다. 나는 아직 취업하지 않은 24살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대학생이라는 든든한 방패를 쥐고 있지만 이제 어느덧 1년의 사용기한을 남겨두고 있다. 이 방패가 쓸모를 잃고 내가 유명한 곳에 취업을 하는 게 우리 할머니께서 분쟁 없는 기싸움에서 승리하실 수 있는 방법이다. 아니면, 다른 친척들이 힘을 내주는 수밖에...





옆집에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우연히 마주치게 돼 안부 인사를 드리면 학교는 어디냐고 자상하게 물어보시고는 바로 강원도에서 교사를 하고 계시는 손녀분의 이야기를 한가위 밥상처럼 푸짐하게 선사해주시곤 하셨다. 우리 할머니께서 꿈꾸시는 손주 자랑 잔치의 맥락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요양원에서 2년 남짓 일하며 할머니들의 낙(樂) 중 하나가 손주 자랑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기에,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손주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실 내 목표 중 하나가 '할머니께서 자랑하실 만한 훌륭한 사람 되기'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할머니의 관심(?)은 내게 부담이 되긴 하겠지만, 일종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우리 할머니께서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입으로 시내를 위풍당당하게 행차하실 수 있도록 오늘도 더 노력해야겠다.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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