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가 없다는 것
섭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비슷한 말로 이치(理致)라고나 할까요. 내 생각이나 계획이 만들어지기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요. 내 바람이나 희망보다 먼저 헤아려지고 적용되어야만 하는, 나보다 더 큰 상위의 존재의 의지나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이 존재하면서부터 만들어진, 혹은 그전부터 있었던 고유의 자연법 같은 것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 류(類)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무단횡단이나 노상방뇨처럼 지켜도 그만, 가끔가다 걸리면 재수 없는 법이 아니라, 관성이나 가속도처럼 어쩔 수 없는 방식으로요. 법칙적인 필연성이라고나 할까요. 의지적인 위반이 애당초 불가능한, 저항할 수 없는 세상의 작동 원리이겠습니다.
그런 것들의 존재로부터 위안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 결심과 역량만으로는 도무지 못할 것 같은 일과 당면할 때, 나의 의지를 뛰어넘어 압도하는 섭리가 작용하는 것을 봅니다. 꼭 해야만 하지만, 아무리 버둥질 쳐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마치 섭리가 구체적인 의지를 가진 듯 개입하여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미워하는 사람에게 친절해야 할 때, 내가 가진 좋은 마음만으로는 턱도 없을 때, 어딘가로부터 사랑이 배어나는 것처럼요. 분명 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제가 믿는 그 섭리의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열없게도 살면서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넉넉히 만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할머니요.
입원 중인 할머니를 뵈러 종종 고향에 다녀옵니다. 지난번에는 과일과 간식을 조금 싸갔는데, 부축 없이는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의 행실 치고선 상당히 모순적입니다. 한 손으로는 저를 붙잡고, 다른 손에는 과일과 음료수를 쥐어들고 걸어갑니다. 병실의 다른 이들에게 건네주려 그에겐 먼 길을 떠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환우의 말에 얼른 먹고 낫기나 하라며 면박을 줍니다.
아플수록 이기적이게 되는 게 사람이라는데, 그 사람의 인과율을 덮어쓰는 법칙이 무엇일지 크게 고심하게 됩니다. 우선 내가 잘 살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당위성이자 합리성이라면, 철저히 비합리적인 이 인물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사람의 피를 이어받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견딜 만하다, 덤덤히 말한다는 것
견딜 만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텅 빈 곳으로의 귀가를 재촉한다는 것
이 또한 사랑이 아닐까 궁지에 몰린 사랑,
그게 아니라면
도리가 없다는 것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우연히 날아온 무엇에라도 맞아 철철 피 흘리지 않을 도리가
박소란, <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 중
사랑하면서도 아프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사랑할 수 없음과 사랑해야 함 사이에서 우리가 찢어지기 때문이라고 김기석 목사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할만하지 않은 대상을 사랑하면서 오는 그 모순을 견디어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견딜만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쓸쓸히 돌아가는 자의 마음에 비친 여러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이만하면 됐다'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모순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는 자의 모습을요. 응전하지 않으며, 순응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자의 모습입니다.
철철 피를 흘려도, 궁지에 몰려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 마음을 올려다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기에, 어찌할 다른 방도가 없기에 사랑한다는 이들의 당연한 듯이 말하는 고백이 제게는 먼바다의 돌섬처럼 까마득이 멀게만 들립니다.
예수가 그랬고, 우리 할머니가 한평생 몸으로 살아낸 그 사랑을 나는 왜 못하는 것일까요.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최문자, <고백> 전문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시이건만 지금 내 마음을 고대로 읽어낸 듯합니다.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막무가내로 사랑해야 하건만 왜 되지를 않는지 고심하고, 그러다가 낙심하게 됩니다. 뺨을 맞으면 반대쪽 뺨도 내어주고, 나를 배신한 제자에게 사랑한다 하는 그 막무가내 한 사랑이야 말로 제가 체득해야 할 것들 중 으뜸일 텐데 진전이 보이질 않습니다. 서까래도 없이 산자를 올리려는 꼴이네요.
그 사랑의 원리를 한참을 앉아서 들여보다가 나직이 가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되갚을 수 없고 다만 흘려보낼 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쥐어짜려 하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돌려받을 것을 조금도 따져보지 않고, 이미 넉넉히 받았기에 넘치는 것들을 흘러넘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음을 비관하다가 내가 받은 큰 사랑을 다시금 확증하게 되고 비로소 내가 흘려보냄으로써 경험하게 됩니다.
위로부터 흘려보내진 사랑은 어딘가 비뚤어진 구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제가 학부에서 공부하던 시절 마지막 학기에 꽤나 어려운 강의를 들었습니다. 졸업을 미루게 될까 근심하며 공부한 덕에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90점을 맞았거든요. 그런데 학기가 끝난 후 받은 성적표에는 A가 적혀 있었습니다. A는 92 점부터였는데 말이죠. 영문을 묻는 메일에 회신된 교수님의 답변에 기가 막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프로야구 경기들이 취소되어 한국 야구를 챙겨보기 시작했는데 응원하게 된 팀이 2연패 후 어젯밤 승리했다는 말과 함께, 기분 좋은 일이 생겼으니 한국에서 온 학생에게 3점은 그냥 주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선례가 없는 전염병 때문에 모두가 혼란스러울 때에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 학생에게 응원을 보낸다는 말과 함께요.
이런 게 아마도 흐르는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5점짜리 문제를 두 개 틀리면 90점을 주는 게 원칙이자 합리라면 제가 경험한 것은 규격을 이탈한, 원칙에 어긋난, 도리에 불합한 선의입니다. 사랑할만한 대상에게만 자연스레 발현되는 선택적인 사랑이 아닌, 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무조건적, 무차별적으로 발현되는 사랑입니다. 오로지 행위자의 결심으로만 발휘되는 것이요.
비합리적이 아니라, 초(超)합리적인 사랑입니다. 합리성을 잃어버린 사랑이 아니라, 초월한 사랑입니다. 받은 만큼 갚아주고, 해준만큼 바라는 것이 세상이 정한 이치라면, 흘러내려오는 사랑은 그 이치를 아득히 덮어버리고 침몰시키는 노도(怒濤)입니다. 사람의 기준은 그 압도적인 격랑 앞에서 철저히 무력합니다. 찰나도 맞서 버티지 못하고 다만 세사로 부서질 뿐입니다.
90점 맞은 놈한테도, 0점 맞은 놈한테도 100점을 줘버리는 사랑인 겁니다. 몇 점짜리 사람이던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우리 외할머니도 그런 마음이었겠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 유익한 대상이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사랑하지 않을 별다른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사랑이 흘러나왔다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배우 로버트 드 니로의 2015년 뉴욕 TISCH 예술대학에서의 졸업연설을 자주 꺼내봅니다. 이성과 상식을 사용하여 사회적인 기준에서의 성공과 안정을 위한 전공을 선택하고 경력을 쌓으려 하는 대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확실성 속에 몸을 던지는 이들에게 전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선택지가 없었어요. 그렇죠? 여러분은 재능을 발견했고 꿈을 키워왔으며 그 안에 있는 열정을 발견했죠. 그걸 느끼게 되면 거스를 수가 없어요. 그냥 하게 되죠. 예술에서는 열정이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But you didn't have that choice, did you? You discovered a talent, developed an ambition, and recognized your passion. When you feel that, you can't fight it. You just go with it. When it comes to the arts, passion should always trump common sense.
내 안에서 위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사랑을 발견하고 느끼는 순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같이 흘러가게 됩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막무가내의 사랑입니다. 막무가내(莫無可奈)라는 말이 사전에서 "달리 어찌할 수 없음"으로 번역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들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저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가진 걸 나누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특히 나보다 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에게 베풀려고 할 때요. 분명 나의 도움 없이도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의 차이가, 그 간극이 너무나 커서 멈칫하고 망설여집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에 내가 조건을 더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자연스레 드는 마음이 응당 들어야 할 마음과는 무척 달라서 근심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주체가 언감히 조건을 더하다니요. 분명 우리 할머니는 그러지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봄은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아니었던 것을 청산하면서 온다고 황현산 선생은 썼습니다. 내게도 흘러내려오는 사랑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내가 붙들고 살았던 척도나 규격 같은 것들을 홍수가 휩쓸며 내려가듯 청산하며 흘러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늘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요.
이렇게 살다가 보면, 살려고 하다 보면 가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지축이 흔들릴 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다행이고, 큰(多) 행복(幸)입니다.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전문
참조: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창작과비평사, 2015). 유안진, <봄비 한 주머니> (창작과 비평사, 2000).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난다, 2019).